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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화 (245/262)

251화

뉘엿뉘엿 지는 붉은 석양을 등 뒤에 두고 서 있는 기사의 수는 언뜻 봐도 레오폴드 기사보다 많아 보였다.

동부령과 남부령에서 보낸 기사단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조금 당황스러워 그들을 빤히 바라봤다.

루센 공작이 선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만 눈속임을 할 줄 아는 건 아닙니다.”

한마디로 나를 속였다는 거구나.

그 말인즉, 내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건데.

더욱 루센 공작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진작 막지 않았지?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을 텐데.

굳이 막지 않아도 자신들이 이길 거라고 확신해서?

이 기회에 나뿐만 아니라 레오폴드 가문을 뿌리째 뽑아낼 생각이었던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황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르니타 왕국군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길 수 있겠지만.

그러면 차후 아르티나 왕국의 간섭을 피할 수 없으니, 되도록 우리 힘으로 이뤄 내고 싶었다.

물론 프로페테스 4세는 언제든지 조건 없이 도와줄 테니,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구두로 한 약속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뀔 수 있으니까.

“항복하세요, 레오폴드 공작.”

3황자, 이안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검을 버리고 항복한다면, 죄를 엄중하게 묻지 않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3황자를 쳐다봤다.

“죄를 엄중하게 묻지 않는다는 건, 어쨌거나 벌은 내리겠다는 건데. 엄청 인심을 쓰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반역은 그 가문은 물론 딸린 가솔들까지 전무 멸하는 대역죄니까요. 완전하게 용서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거 잘됐네요. 어차피 용서를 받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거든요. 저 역시 황제가 저와 아버지에게 한 짓을 용서할 생각이 없고요.”

“부황 폐하께서 공작에게 한 짓이라고요?”

“모르셨습니까? 황제는 레오폴드 영지를 집어삼키려고 아버지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저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

“선대 레오폴드 공작 각하께서 살해당하신 거라고? 황태자 전하를 구하다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이안과 그의 기사들은 기함했지만, 루센 공작은 담담했다.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

그 말인즉, 아빠가 살해당했다는 가설이 진실이라는 의미이니,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황제의 궁으로 달려가 황제를 끌어내고 싶었다.

당황하는 그 얼굴을 발로 짓뭉개고, 개 같은 소리만 뱉는 혀를 잘라 낸 뒤, 실컷 조롱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만.”

깊은 분노에 잠식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진정해, 아델.”

페르데스였다.

그는 꽉 쥐고 있는 내 손 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억지로 손을 펼쳤다.

그러자 손톱 모양으로 움푹 파여 피가 고인 상처가 보였다.

손톱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줄도 모르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것.

페르데스가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주며 말했다.

“화가 나면 그대 몸에 상처 내지 말고, 차라리 저 놈들을 때려.”

그러게. 바보 같이 왜 내 손에 상처를 낸 건지.

나는 페르데스에게 짤막하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3황자를 돌아봤다.

“거, 거짓말이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멍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3황자가 소리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나를 현혹시키려고 하다니……!”

“제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루센 공작에게 물어보면 되겠네요.”

3황자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리며 루센 공작을 쳐다봤다.

그건 그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참.”

루센 공작은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선대 레오폴드 공작은 황태자 전하를 구하다가 죽은 게 아니라, 황태자의 호위 기사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루센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한 번 찔러 본 건데, 사실대로 전부 말할 줄이야.

조금 놀라우면서도 의아했다.

순순히 실토하는 걸 봐서 황제의 편을 들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저기 있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부황 폐하께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셨을 리가 없어.”

루센 공작이 사실 확인을 시켜 줬는데도, 3황자는 좀처럼 믿지 못하고 부정했다.

남부령과 동부령 기사들도 상당히 동요한 눈치였고.

반면 레오폴드 기사들은 투지에 불타올랐다.

굳이 그들을 돌아보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쓸데없는 잡담은 여기까지 하죠.”

수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상황인지라 걱정했는데, 이러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길 거야.

아니,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나는 검을 빼 들고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 * *

아델의 부친인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죽은 뒤, 레오폴드 기사단의 위상은 낮아졌지만, 그들의 실력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선대 레오폴드 공작 때부터 레오폴드 기사단에 있던 자들이었다.

황실 기사단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알려진 기사단 소속답게 레오폴드의 기사들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쪽으로 조금씩 승기를 가져왔다.

기사들이 승기 줄다리기에서 우세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일당백을 하는 아델의 역할이 가장 컸다.

같은 생을 4번이나 반복하면서 탄탄하게 다져진 검술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레드 드래곤의 축복, 아니 피를 이어 받아 보통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도 한몫했다.

승기가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확실하게 승기를 낚아채고자 아델이 3황자, 이안 쪽으로 다가가려는 그때, 누군가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카캉-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상대는 지금까지 그녀가 싸웠던 적들과 달리 급소를 정확하게 노렸다.

눈에 익은 검법.

‘아나토메 친위대구나.’

지금까지 싸웠던 어중이떠중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실력자의 등장에 아델은 약간 긴장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건, 아나토메 친위대가 한 명이 아니라는 거였다.

‘총 네 명인가.’

예전에 아나토메 친위대를 상대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싸울 공간이 넓고, 아델은 마비 독에 걸리지 않았다는 거였다.

‘저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졌지.’

그때의 아나토메 친위대와는 달리, 지금 싸우는 놈들은 하나같이 급소만 노렸다.

어떻게든 아델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보였다.

‘정말이지, 끝까지 짜증 나는 놈들이구나.’

아델은 혀를 차며 가장 먼저 달려든 놈의 검을 허리를 숙여 피했다.

그대로 다리를 뻗어 그 놈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왼손으로 검을 휘둘러 잇따라 쇄도하는 공격을 막아 냈다.

그때, 다른 아나토메 친위대가 무방비해 보이는 그녀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건 막을 수 없어.’

빠르게 판단을 내린 아델은 검을 맞대고 있던 자를 밀어낸 뒤,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단도가 날아왔다.

아델은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 못해 옆구리가 살짝 긁혔다.

“아델!”

아델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걸 본 페르데스가 달려가려고 하자, 아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괜히 와서 방해하지 말고 거기 계세요!”

방해. 정곡을 찌르다 못해 명치를 후려치는 말에 페르데스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델은 제가 한 말이 페르데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나토메 친위대를 상대하는데 집중했다.

두 명까지는 거뜬하게 상대할 수 있었지만, 세 명은 조금 힘들었고, 네 명은 버거웠다.

그때 마비된 몸으로도 친위대를 상대할 수 있었던 건, 길이 좁아서 적들이 한꺼번에 덤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들이 그녀의 목숨을 노리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고.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다른 데다가, 아나토메 친위대 외에도 그녀를 노리는 적들이 많아 더욱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데, 작심한 듯 아나토메 친위대가 한꺼번에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단장님!”

정신없이 싸우다가 뒤늦게 아델의 상황을 파악한 코너와 몇몇 기사들이 기함하며 그녀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적들이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안 돼!”

레오폴드 기사들이 절규하는 소리가 처참하게 울려 퍼졌다.

아델 역시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최대한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그때.

콰쾅-

어디선가 푸른색의 마법 화살이 날아와 아델을 공격하려는 자들의 몸을 꿰뚫었다.

갑작스러운 마법 공격에 아델은 물론 근방에 있는 모두가 화살이 날아온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검 대신 펜을 들고, 푸른 마법진 위에 서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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