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아버지를 향한 기사들의 충정을 알기에 일부러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사실임에도,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 패를 꺼냈다.
그러면 분노하면서 나를 따르겠다고 하겠거니,
몇몇은 반역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와 같은 길을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내 예상과 달리 그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정중하게 부탁하니, 거기에 반응해서 내 뜻을 따라 주겠다고 했다.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결연해졌다.
반드시 이기리라.
그래서 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않으리라.
가슴 깊이 다짐하며, 기사단과 함께 기차역을 나섰다.
기차역 앞에는 로고스 경이 데리고 온 아르티나 왕국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대기하도록.”
나는 기사들을 두고 로고스 경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건 왕국군도 마찬가지였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나는 그들이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러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페르데스와 프로페테스 4세가 보였다.
“각하?”
뒤늦게 내가 온 걸 안 로고스 경이 약간 놀라며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그나저나 페르데스 님과 국왕 전하께선 그새 제법 친해지신 모양이군.”
“네? 도대체 어딜 봐서요?”
로고스 경은 물론이고 왕국군도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아닌가? 두 분이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혹시 제국에서의 ‘오붓하게’의 뜻이 연합국과 다른가요?”
“그럴 리가.”
“그럼 공작 각하께서 잘못된 단어를 쓰신 거군요.”
도대체 뭐라는 건지.
나는 이상한 말을 하는 로고스 경을 뒤로하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분, 여기서 뭐 하세요?”
말을 걸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왔네.”
“왔군.”
둘 다 환하게 웃으면서.
역시 친해진 거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웃고 있을 리가 없잖아?
프로페테스 4세가 내게 말했다.
“왔으면 이만 출발할까? 더 지체했다간 우리가 온 게 황궁 쪽에 흘러들어 갈 수 있으니까, 서두르지.”
“그러죠.”
프로페테스 4세가 먼저 가고 나와 페르데스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 그러고 보니.”
앞서 걸어가던 프로페테스 4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뱉으며 돌아봤다.
“저 남자가 탈 말은 없는데, 어떡하지?”
“아, 그래요?”
“응. 공작이 미리 알려 준 인원수에 맞춰서 딱 준비해 뒀는데…….”
프로페테스 4세는 페르데스를 흘겨본 뒤, 내게 물었다.
“혹시 레오폴드 기사 중에 탈주한 사람이 있어?”
“아니요. 고맙게도 전부 다 저와 뜻을 함께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남은 말이 없는데, 어떡하지?”
그러게. 어떡하지?
고민하는데, 페르데스가 말했다.
“준비된 말이 없다면 근처 마시장에서 사 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건 불가능해.”
프로페테스 4세가 대답했다.
“이미 이 근방에 있는 마시장은 전부 털었거든.”
“그럼 말 대여소는?”
“거기도 이미 털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인원이 탈 말을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인데.
페르데스도 그렇게 느꼈는지 인상을 팍, 쓰며 프로페테스 4세를 노려봤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것도 잠시. 페르데스는 선연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와 함께 타고 가는 수밖에.”
“……뭐?”
“그러면 되겠네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좋은 방법이었다.
“그럼 저와 같이……”
“잠깐.”
같이 말을 타는 걸로 결론을 내리려는데, 프로페테스 4세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로고스 경이 혹시 몰라 몇 마리 더 준비해 놨다고 했던 것 같아.”
“그래요?”
“응. 그렇지, 로고스 경?”
프로페테스 4세는 때마침 다가온 로고스 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로고스 경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나와 페르데스 쪽을 흘겨보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렇다는군. 그러니 말은 각자 타는 걸로 하지.”
뭔가 이상한데.
“그럼 얼른 가지.”
상당히 찝찝했지만, 프로페테스 4세가 훌쩍 가 버려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
보통 크라드에서 수도까지는 말을 타고 한나절 정도 걸렸지만, 그건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등 여유를 두고 갔을 때의 이야기였다.
쉬지 않고 계속 달린다면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델은 당연하게도 후자를 선택했다.
비가 온 건지 축축해진 땅에 무수한 말발굽이 찍혔다.
아델은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칼이 풀어지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렸다.
페르데스와 레오폴드 기사단이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프로페테스 4세와 아르티나 왕국군은 조금 더 뒤에서 따라왔다.
* * *
[레오폴드 공작가는 제국의 검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황실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새삼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고삐를 쥔 아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령 황실에서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더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해.]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아빠는 황제가 그를 죽이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 * *
시간이 지날수록 뒤처지는 기사들이 하나둘씩 속출했지만, 그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말이 지쳐서 혹은 말에 문제가 생겨서.
그나마 말이 지친 거라면 잠깐 쉬면 되지만, 문제가 생긴 거라면 상황이 달라졌다.
산 중턱에서 새로운 말을 구할 수도 없는 터라 아델이 곤란해하자, 기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두 발로 뛰어가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가십시오, 단장님.”
늦을지언정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아델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 * *
수도에 도착하기 직전, 아델은 레오폴드 기사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민간인을 절대 공격하지 말 것.
도망치는 자를 추격하지 말 것.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황제라는 걸 잊지 말 것.
다른 걸 탐내지 말 것.
아델은 같은 이야기를 프로페테스 4세에게도 말하며, 꼭 지켜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로페테스 4세가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마지막 조건은 못 지킬 것 같은데.”
“그 말은 달리 탐낼 게 있다는 건가요?”
“있지.”
프로페테스 4세가 제 모습을 담은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뭐라 말하려는 찰나, 페르데스가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쓸데없이 시간 버리지 말고 얼른 가자, 아델.”
그는 프로페테스 4세 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아델만 데리고 갔다.
프로페테스 4세는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짜증스레 혀를 찼다.
“진짜 성가신 놈이야.”
* * *
우선 레오폴드 기사단이 산을 내려와 수도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대놓고 레오폴드 기사단의 깃발을 흔들면서.
“뭐야, 레오폴드 기사단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딜롬에 간 거 아니었어?”
수도의 경비들은 의아해했지만, 맨 앞에 아델이 있는 걸 확인하고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설마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레오폴드 가문의 가주가 반역을 일으켰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덕분에 수월하게 수도 안으로 들어온 아델이 크게 외쳤다.
“수도 성문을 개방하라!”
레오폴드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수도의 경비들을 제압하고, 성문을 활짝 개방했다.
난데없는 공격에 수도의 경비들이 얼빠져 있는 사이, 프로페테스 4세가 이끄는 왕국군이 수도 안으로 들어왔다.
“도, 도망쳐!”
“으아악!”
평화로웠던 수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탈환전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여기던 사람들은 아연실색하며 도망쳤다.
레오폴드 기사단은 물론 아르티나 왕국군도 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황궁 쪽으로 달려갔다.
황궁에는 이미 소란을 전해 들은 황궁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레오폴드 공작! 수도에 허락도 없이 기사단을 끌고 오다니!”
맥밀 후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델이 웃었다.
“보면 모르겠나. 황제 폐하를 뵈러 온 거지.”
“그 무슨……! 설마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말입니까?”
“후작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아델이 시니컬하게 대답하자, 맥밀 후작은 인상을 팍, 썼다.
“감히 반역을 하고도 공작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것도 다른 왕국과 손을 잡고 반역을 저지르다니! 삼대가 멸할 겁니다!”
“그것 참 궁금하네.”
아델이 검을 빼 들었다. 검 손잡이에 박힌 붉은 퓨라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내 가문이 먼저 멸할지, 아니면 후작의 가문이 먼저 멸할지 정말 궁금해.”
* * *
반토막 난 황궁 기사단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델이 일당백 역할을 해준 덕분이기도 했다.
아델과 레오폴드 기사단은 황궁의 성문을 강제로 개방하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프로페테스 4세와 아르티나 왕국군은 밖에서 다른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켰다.
되도록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덤비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했다.
깨끗했던 검이 검붉은 피로 얼룩졌다.
그렇게 거침없이 황제의 궁으로 향하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으니.
“진짜 반역이었다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반역이라고 했잖아요.”
바로 루센 공작과 3황자, 이안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남부령과 동부령에서 보낸 기사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