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페르데스 님과 함께 가게 됐어요.”
내 말에 프로페테스 4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대답지 않은 결정이군. 저 남자가 같이 가자고 우겨도, 칼같이 거절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차마 페르데스가 이상한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프로페테스 4세는 내 옆에 서 있는 페르데스를 흘겨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아. 이번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사람은 그대이니, 그대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쪽 일을 얼른 마무리 짓지 그래?”
프로페테스 4세가 말하는 저쪽 일이란 건, 기사단에게 어떻게 된 건지 사정을 설명하는 거였다.
“아까부터 목이 빠지도록 그대를 기다리고 있던데.”
“안 그래도 지금부터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 주시겠어요?”
“그 말은 나도 나가라는 거지?”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10분 안에 끝내고 나오도록 해. 그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그대도, 나도 곤란해질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페르데스에게 말했다.
“페르데스 님도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그래.”
아까처럼 이상한 고집을 또 부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프로페테스 4세를 비롯한 연합군과 페르데스가 정거장 밖으로 나가자, 우리 쪽을 계속 보고 주시하고 있던 코너 경이 다가왔다.
“단장님.”
“지금 가지.”
진짜 시작이구나.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기사들 앞에 섰다.
* * *
“왜 로스덤이 아니라 크라드에 온 거지?”
“안 그래도 코너 경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단장님에게 물으러 갔는데, 나중에 말해 주겠다고 일단 짐을 전부 챙겨서 내리라고 명령하셨대.”
“그 말은 로스덤으로 가지 않는다는 거야? 왜? 탈환전은 어쩌고?”
“그야 나도 모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웅성거리던 레오폴드 기사들은 아델이 다가오자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녀를 주시했다.
아델은 4열 종대로 반듯하게 서 있는 기사들을 쭉, 훑어본 뒤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선 그대들을 속인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하겠다.”
넓은 정거장에 아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절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경들에게도 숨겨야 했다. 그 부분을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아델의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엄중했다.
게다가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무거우니, 기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아델의 말을 경청했다.
“지난 수백 년간, 레오폴드 가문은 제국의 검으로서 제국과 황실을 위해 헌신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순간 일그러졌다.
아델은 씹어뱉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지독한 배신뿐이었다. 황실은 레오폴드 영지를 통째로 집어삼키고자 아버지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나까지 죽이려고 했다.”
“……!”
황실이 선대 레오폴드 공작을 살해했다니!
그것도 모자라 아델까지 죽이려고 했다니!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들은 기사들은 전부 기함했다.
“레오폴드 영지는 제국의 것이 아닌 레오폴드 가문의 것이다. 레드 드래곤이 초대 레오폴드 공작에게 선물한 땅이지.”
혼란 속에 아델의 말이 이어졌다.
감히 단장님의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으니, 기사들은 충격에 흐트러진 정신을 재빨리 다잡았다.
“누군가 레오폴드 영지를 노린다면, 나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울 것이다. 상대가 설령 황실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런 보람도 없이, 연달아 충격적인 폭탄이 날아왔다.
몇몇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또 몇몇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진심이십니까?”
아델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가늠하고 있던 덕분에, 그나마 충격을 크게 받지 않은 코너가 아델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반역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단장님?”
“반역이 아니라 내 것을 지키려는 것뿐이다.”
코너는 그게 그 말이 아니냐고 물어보려다 말을 삼켰다.
“나는 단순히 내 것을 지키려는 것뿐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반역으로 보인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경들이 이리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아델이 진지한 얼굴로 충격에 허덕이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나는 내 가문을, 영지를, 그리고 영지민들을 지켜야 하니까. 반역이라고 해도 싸울 수밖에 없다.”
처음과 달리 약간 젖은 목소리가 기사들의 고막을 파고들어 충격에 멍해진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아델을 쳐다봤다.
아델은 심오한 눈으로 말없이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허리를 깍듯이 숙였다.
“부탁한다.”
공작이자 단장인 아델이 일개 기사인 자신들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이어진 그녀의 말이었다.
“레오폴드 영지를 지키기 위해선 경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
“부디 나와 함께 레오폴드 영지를 지켜 줘.”
말이 좋아 함께 영지를 지키는 거지, 같이 반역하자는 거였다.
한데도 거부감보다 동조심이 먼저 드는 건, 정중한 아델의 태도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내 기사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강압적으로 명령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정중하게 부탁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델의 태도에 기사들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단장님은 우리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중해 주고 있구나.
감동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마음 같아선 함께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뜻 그러지 못하는 건 반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반역은 성공하면 혁명이 되지만, 실패하면 저는 물론 가문 자체가 멸하게 되니까.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코너가 검을 빼 들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
“레오폴드 기사의 역할은 레오폴드 가문에 충성을 다하며 가문과 영지를 지키는 것.”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경건하게 말했다.
“레오폴드 기사로서, 당연히 단장님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코너의 말과 행동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기사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 역시 레오폴드 기사로서 단장님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붉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아델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
정거장을 가득 채우는 붉은 메아리에 아델의 눈시울이 약간 젖었다.
아델은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르고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검을 빼 들었다.
“레오폴드 가문을 위하여.”
아델과 레오폴드 기사단의 결의를 응원하려는 듯 눈부신 햇살이 날카로운 검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아델이 레오폴드 기사단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각.
페르데스와 프로페테스 4세 일행은 기차역 앞에서 아델과 레오폴드 기사단이 나오길 기다렸다.
페르데스는 프로페테스 4세 일행과 한참 떨어져 서 있었기에 언뜻 보면 일행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로고스가 페르데스를 일별하며, 프로페테스 4세에게 말했다.
“황제의 목을 치러 가면서, 그 아들과 함께 가겠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될 건 없지. 저 황자는 반푼이라서 황자 대우를 받긴커녕 오히려 온갖 멸시를 받았으니까. 황제랑 다른 황족들을 몹시 증오하고 있을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공작의 약혼자가 소문의 4황자였죠.”
로고스는 비로소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데 어떻게 반푼이 황자가 공작과 약혼한 거죠?”
“듣기로는 공작이 직접 선택했다더군.”
“네? 왜요? 반푼이 황자가 어디에 도움이 된다고? 설마 사랑하기라도 한답니까?”
사랑. 그 단어를 페르데스와 아델 사이에 대입하기엔 기분이 나빠 프로페테스 4세는 눈썹을 찡그렸다.
“어엇, 갑자기 어디 가십니까!”
그리고 놀라는 로고스를 뒤로한 채, 페르데스에게 다가갔다.
눈을 지그시 감고, 기둥에 기대 서 있던 페르데스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곧 정면에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했다.
어찌나 살벌한지, 프로페테스 4세를 따라왔던 로고스는 흠칫 놀라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살 떨리는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프로페테스 4세였다.
“레오폴드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지?”
의미심장한 질문.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페르데스가 지지 않고 받아치자, 프로페테스 4세가 입매를 비틀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혹여 자네가 레오폴드 공작의 발목을 잡을까 봐 걱정돼서 물어본 거라네.”
“내가 아델의 발목을 잡는다고?”
아델. 페르데스가 그녀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자, 프로페테스 4세의 눈 밑이 살짝 떨렸다.
“그래. 그녀를 사랑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 않고 질척거릴 수도 있지 않은가.”
페르데스가 사납게 받아쳤다.
“그건 나와 아델의 일이니, 제3자는 신경 끄지 그래.”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뭐?”
“좋아하거든.”
프로페테스 4세는 만개한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녀의 옆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거머리가 붙어 있는 걸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러니, 좀 떨어져 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