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레오폴드 영지로 가고 있어야 할 페르데스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몹시 당황스러워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할까?”
“……이쪽으로 오세요.”
나 역시 페르데스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던 터라, 그를 데리고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쾅, 객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커튼으로 창문도 가리고,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왜 이곳에 계시는 거죠? 지금쯤이면 마티나 역에서 내려 레오폴드 영지로 가고 있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미안. 급한 사정이 생겨서 그러지 못했어. 아주 중요한 사정이기도 하고.”
“그럼 저한테 미리 연락하시지 그러셨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통신이 안 되더라.”
“네? 정말요?”
깜짝 놀라며 되묻자, 페르데스가 웃었다.
“역시 몰랐나 보네.”
“죄송해요.”
“그대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몰랐다는 건 나한테 연락할 일이 없었다는 거고, 동시에 그대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니 오히려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치고 그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그만큼 큰일이 있었다는 건데, 설마?
“혹시 알도르 경을 찾았나요? 그래서 그가 디아볼로스에 걸린 걸 확인하신 거예요?”
불안한 마음에 쏘아붙이듯이 묻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무슨 일인데요?”
페르데스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열어 봐. 열어 보고 너무 충격받지는 말고.”
뭐길래 미리 경고를 하는 걸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금색 머리카락과 말라비틀어진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뭐예요?”
“피부.”
뭐?”
“황제의 몸에서 떼어 낸 피부 조각이랑 머리카락이야. 정확히는 허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허물은 무릇 뱀이나 곤충처럼 탈피를 하는 종족에게 쓰는 단어였다.
사람이 아니라.
그런데 이게 황제의 허물에서 떼어 낸 피부 조각이랑 머리카락이라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상자 속 내용물을 빤히 바라봤다.
“이틀 전에 에런 경에게 연락이 왔었어.”
머리 위로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와 알도르 경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황궁으로 들어갔으니, 나보고 대신 추적해 달라고 부탁하더군.”
잠깐.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이틀 전에 황태자가 황궁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그럴 리가 없어요. 황태자는 그것보다 훨씬 전에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오웬으로 출발했는걸요. 황도에 있을 리가 없어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해서 에런 경에게 잘못 본 게 아니냐고 물어봤는데, 확실하다고 하더라. 알도르 경으로 추정되는 남자도 그를 황태자라고 불렀고.”
“황실 기사단 쪽은요? 그쪽에 연락해서 황태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확인해. 원수부에서 허락해 주지 않을걸.”
아, 그렇겠네. 백치병 때문에 페르데스는 탈환전에서 완전히 제외됐으니까.
“그래도 황태자가 무사히 오웬 근처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건 확인했어.”
“그럼 역시 에런 경이 잘못 본 거 아닌가요?”
“나도 그걸 확인하면서 동시에 알도르 경으로 추정되는 남자도 찾으려고 레오폴드 영지로 가는 걸 포기했던 거야.”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내심 페르데스가 나와 한 약속을 어긴 게 섭섭했는데,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렇게 황궁을 뒤지다가, 결국 황제의 궁까지 들어갔는데 누군가 나한테 지하실이라고 적힌 돌을 던졌어.”
“누가 그런 거죠?”
“누군지 확인은 못 했지만, 아마 알도르 경인 것 같아.”
알도르 경이…… 그랬다고?
“지하실에 뭔가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신호를 보낸 것 같아, 곧장 지하실로 내려가 봤어. 그리고…… 우욱.”
페르데스는 갑자기 인상을 팍 쓰더니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황급히 그의 등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페르데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새삼 그 장면을 떠올리니까 너무 끔찍해서 그래.”
“도대체 지하실에 뭐가 있었길래 그러시는 건데요?”
“내가 그대한테 준 거.”
나한테 준 거?
시선이 저절로 페르데스에게 받은 상자로 향했다.
황태자의 허물에서 가지고 온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물건.
“지하실에는 황제의 허물이 있었어.”
페르데스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 개도 아닌, 수십 개가 말이야.”
* * *
지금도 눈을 감으면 지하실에서 봤던 끔찍한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럴 때는 기억력이 좋은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까.
페르데스는 혀를 차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었다.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당시 페르데스는 뱀의 허물처럼 말라비틀어져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황제의 허물을 보는 순간, 기함하며 눈을 질끈 감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상황이 파악되자 뒤늦게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했으나, 혹 다른 사람이 들을세라 억지로 삼켰다.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다시 올라가려던 참에, 어쩌면 저 허물들이 아델이 황제를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황제의 허물에서 머리카락과 피부 조각을 떼어 낸 것.
증거물을 확보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면서,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게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디아볼로스와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마법진이 있었어. 피로 그린 마법진이 말이지.”
겨우 끔찍한 잔상에서 벗어난 페르데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마 내 예상인데, 그게 모체인 것 같아.”
“모체요?”
“응. 이전에 비블로스 님에게 들은 건데, 디아볼로스처럼 저주 형태의 마법진에는 모체 마법진이 존재한대. 그 마법진을 이용해서 대상에게 저주를 거는 거지.”
이어진 설명에 아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말은 아나토메 친위대나 다른 사람들에게 디아볼로스를 건 사람이 황제가 확실하다는 거네요.”
“그래. 그리고 황제는 아마도 인간이 아닐 거야. 아니, 확실하게 인간이 아닐 거야. 인간은 허물을 벗을 수 없으니까.”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아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별로 안 놀라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보통은 놀라지 않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잖아.”
“그건 아니에요.”
세상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없으니까.
아델은 회귀라는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네 차례나 경험했던 터라,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두었다.
“이것 참.”
예상하지 못한 아델의 반응에 페르데스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쓱쓱, 만졌다.
“그대가 깜짝 놀라거나 무서워하면, 달래 주면서 황궁에 가지 말라고 말하려 했는데, 난감하네.”
“황궁에 가지 말라고요?”
“그래.”
페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방금 말했다시피 황제는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그대는 평범한 인간이지.”
“저도 평범하지는 않아요.”
보통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래도 황제와 비교하면 평범한 인간이잖아. 그대가 그와 붙어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해 봐야 아는 거죠.”
“아니. 내 생각엔 못 이겨.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대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그러니까……”
“후퇴하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아델은 페르데스의 손을 떼어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목적지가 코앞인데,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건 장난이 아니라 그대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라고.”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라고 해주세요.”
“아델.”
“어차피 돌아가도 저는 죽어요.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고, 기사들을 수도 근처까지 끌고 왔으니까요.”
그뿐인가. 위조 금화를 뿌려 제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연합군과 손을 잡고 그들이 제국을 침공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까지 싸워야만 해요.”
“전부 놓아 버리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잖아. 날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유롭게 풀어 주려고 한 것처럼, 그대도 그러면 되는 거잖아.”
아델이 픽,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이 머리색으로요?”
레오폴드 가문의 혈육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붉은 머리.
페르데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이자, 아델이 그의 팔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 테니까요.”
“…….”
“그러니 페르데스 님은 수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계……”
“아니.”
페르데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투지로 번뜩였다.
“나도 그대와 같이 가겠어.”
“네? 그건…….”
“선택해. 나와 함께 멀리 도망치든지, 아니면 같이 황궁으로 가든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인지.
당황한 아델이 멈칫하자, 페르데스는 선택지는 오로지 두 가지뿐이라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물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나를 강제로 떼어 내는 방법도 있겠지.”
“……”
“만약 그러면 그땐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그러니까 잘 선택하도록 해, 아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