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5화 (239/262)

245화

모두가 잠든 늦은 밤.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마구간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깨끗한 물이 담긴 수통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홀연히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새벽녘의 여명이 어렴풋이 세상을 밝히는 이른 아침.

“하암, 피곤해 죽겠네.”

“그러게. 갑자기 관리해야 하는 말이 늘어서…….”

마구간지기들이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출근했다.

그들은 우선 밤새 말들이 무탈하게 잘 있었는지 확인한 뒤, 물과 여물을 챙겨 주었다.

“오늘부터 힘차게 달려야 하니, 많이 먹어라.”

부모가 된 마음으로 듬뿍듬뿍 챙겨 주고, 다른 일을 하려는 그때.

쿵-

“……!”

“뭐, 뭐야!”

조금 전만 해도 멀쩡하게 물을 마시던 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 * *

레오폴드 기사단을 마지막으로 모든 기사단이 모였으니, 예정대로라면 오늘 이른 아침에 딜롬과 프론드를 탈환하기 위해 출발해야 했다.

그래, 예정대로라면 말이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인님! 송구합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용서를 구하는 마구간지기들을 내려다봤다.

그 앞에는 웨일 백작이 오만상을 쓰며, 미간을 짚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내일 당장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 같았다.

다른 북부령 귀족들 역시 몹시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마티나 백작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와 눈빛을 교환한 뒤에는 뭔가 알아챈 듯 침착해졌다.

“이, 이건 모두 먼드의 잘못입니다. 저 녀석이 수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맞습니다! 먼드가 수통만 제대로 관리했다면 이런 참극은 없었을 겁니다!”

“아, 아니에요! 이건 불침번을 제대로 못 선 저 자식의 잘못입니다!”

“이게 불침번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모두 그 입을 닥쳐라!”

웨일 백작의 고함 소리가 넓은 마당에 사자후처럼 울려 퍼졌다.

“수통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사단을 내 놓고, 무슨 할 말들이 그리도 많은 게야!”

감정이 더 격해지기 전에 슬슬 나서 볼까.

“뚫린 입이라고 뱉으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만.”

나는 웨일 백작의 등을 잡았다.

“저들이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화내지 말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게 백작.”

내 말에 마구간지기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날 바라봤다.

반면 웨일 백작은 몹시 황당해하며 내게 물었다.

“혹 공작 각하께선 저놈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것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알고 있네.”

내가 한 짓인데, 모를 리가.

“그런데 어찌 저들을 용서하라 하시는 겁니까. 저들이 수통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말들이 중독되는 바람에 출전을 못 하게 됐는데……!”

“출전은 할 수 있지. 다행히 7개의 마구간 중, 두 곳만 전멸을 당했으니까.”

물론 이것 역시 내 계획이었다.

“지금 대략 200 필 정도가 중독돼서 쓸 수 없으니, 기사단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출전하면 되겠군.”

북부령 귀족 중 한 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사단 하나가 빠지는 건 전력 손실이 너무 큽니다. 탈환전에 참패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아예 빠지는 게 아니라, 나중에 합류할 거니까.”

“네? 그게 무슨……?”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네.”

내 대답에 귀족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내게 처음 질문했던 북부령 귀족이 물었다.

“기차를 타면 한참 돌아가서 제시간에 도착하기 힘들뿐더러, 딜롬에는 기차역이 없습니다, 각하. 프론드는 역이 있지만,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어 그곳에선 내릴 수가 없고요.”

“설마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픽, 웃으며 되묻자 북부령 귀족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내가 말한 종착역은 로스덤 역일세. 로스덤에서 딜롬까지 도보로 하루 정도 걸리니까. 먼저 딜롬에 도착한 기사단은 그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선공하지 말고, 대치전만 하면 될 것 같아.”

내 말에 웨일 백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오나 그러면 다섯 영지를 동시에 탈환한다는 작전이 실패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아니면 다른 좋은 계획 있는 사람?”

웨일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럼 내 의견에 동의하는 걸로 알고, 기차부터 알아보도록 하지. 그 부분은 해 줄 수 있겠지, 웨일 백작?”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웨일 백작이 떠나고 나는 마티나 백작을 슬쩍, 흘겨봤다.

“제 생각엔 레오폴드 기사단이 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눈치챈 마티나 백작이 나섰다.

“그들은 가장 늦게 합류해서 여독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데다가, 기존의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돼서 공작 각하께서는 다른 공격대의 수장들과 연락해서 새로운 작전을 논의하셔야 할 테니까요.”

저쪽이 밑밥만 던져두면 알아서 물고기를 낚으려고 했는데, 직접 고기까지 낚아 주니 편리했다.

역시 마티나 백작을 믿고 맡기길 잘했어.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시간이 지체된 만큼, 레오폴드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기사단들은 빠르게 짐을 챙겨 웨일을 떠났다.

그럼 나도 출발해 볼까.

돌아서는데, 타이밍 좋게 프로페테스 4세가 다가왔다.

“준비는 다 됐겠죠?”

내 질문에 그가 선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 * *

“여전히 안 되네.”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곤히 잠든 미니 드래곤을 내려놓았다.

비블로스에게 연락하려고 몇십 번을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비블로스와 연락할 수 없다는 건, 아델과도 연락할 수 없다는 의미.

“큰일 났네.”

아델에게 아무런 정보도 전해 줄 수 없을뿐더러,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전달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불안했다.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서성이던 페르데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레오폴드 영지로 가자.”

아델은 떠나기 전, 페르데스에게 황도는 곧 전쟁 통이 될 테니, 피해가 가지 않게 레오폴드 영지로 가라고 말했었다.

바로 떠나면 황제나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알아볼 것도 있어 이곳에 있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아델과 연락이 안 되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기 있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 페르데스는 짐을 챙겼다.

그리고 감시역의 눈을 피해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곧장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은 늘 그랬듯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등석을 예매할 땐 줄을 설 필요가 없었지만, 오늘은 신분을 숨겨야 하니 줄을 서서 가장 낮은 등급의 좌석을 샀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섞여 기차가 오길 기다리면서 비블로스에게 계속 연락을 넣어 봤지만 여전히 불통이었다.

이쯤 되니 비블로스의 안위도 걱정됐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하아.”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가슴팍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목걸이로 만들어 끼고 있던 마법 통신 반지가 반짝이는 거였다.

즉, 에런에게 연락이 왔다는 의미.

페르데스는 비교적 인기척이 드문 구석에 박혀 연락을 받았다.

“나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에서 긴박함을 느꼈는지, 에런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했다.

[방금 황태자와 알도르 경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황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뭐?”

알도르를 닮은 남자는 그렇다 쳐도, 황태자가 황궁으로 들어갔다니?

“확실한가?”

[네. 분명히 황태자였습니다. 알도르 경으로 추정되는 남자도 그 사람을 황태자라고 불렀고요.]

황태자라는 호칭을 아무한테나 쓸 리가 없으니, 에런이 본 남자는 황태자가 확실할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쯤이면 오웬에 있어야 할 황태자가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속 추적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황궁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에런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송구하지만 페르데스 님께서 대신…….]

때마침 기차가 정거장으로 들어오면서, 거대한 소음에 에런의 목소리가 묻혔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에런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를 대신해서 황태자와 알도르를 추척해 달라는 거겠지.

페르데스의 시선이 막 정거장에 정차한 기차에 닿았다.

이번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는 이틀 뒤에나 탈 수 있었다.

그러면 레오폴드 영지에 가 있으라는 아델의 부탁을 어기게 되고.

기차를 타자니 알도르와 황태자가 황궁으로 들어갔다는 에런의 말이 걸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맞는 것일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기차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돌아섰다.

“내가 따라가 볼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