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38/262)

244화

황태자의 서재에 있던 책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온 페르데스는 끼니를 챙기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은 채 집중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가지고 온 책은 백과사전처럼 악마의 종류나 특징 같은 걸 적어 놓았을 뿐, 그가 원하는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짜증 나네.”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으니, 짜증이 나면서도 허탈했다.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현재 시각 새벽 3시 반.

잠들기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침까지 깨어 있기도 애매했다.

‘조금이라도 자는 게 낫겠지.’

페르데스는 책을 안 쓰는 베갯잇 안에 넣고, 촛불을 껐다.

새카만 어둠이 드리운 침실.

커튼 때문에 새벽녘의 여명조차 깃들 수 없는 방 안에서 페르데스의 손가락이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정확히는 그의 손가락 끝에 묻은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거였다.

“이건 말루스 꽃으로 만든 야광 물질이잖아.”

예전에 아델이 보여 줘서 잘 알고 있었다.

이걸 이용해서 황제가 잭에게 허튼수작을 부렸다는 것도 알아냈었고.

하여간 최근 그 물질을 만진 적이 없는데, 손가락에 묻어 있으니 조금 황당했다.

‘언제 묻은 거지?’

어젯밤에는 이런 게 없었으니까, 오늘 묻은 것 같은데.

반짝반짝 빛나는 손가락을 비비며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페르데스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베갯잇 안에 넣어 두었던 책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책의 맨 뒤쪽, 빈 여백에 반짝거리는 글씨가 보였다.

그 내용을 읽은 페르데스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황제는 오래전,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그 자체로 재앙이자 저주다.]

예사롭지 않은 내용.

혹시 다른 것도 있나 싶어 살펴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슨 내용이지?”

페르데스는 문장을 곱씹어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상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었다.

‘비블로스 님이라면 알지도 몰라.’

연락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페어리를 통해 비블로스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뭐야.”

어째서인지 깊은 잠이 든 드래곤 페어리가 깨어나질 않았다.

아니, 이건 잠든 게 아니라 생명력이 끊어진 거야.

페어리의 생명력은 시전자의 마나였다.

즉, 비블로스로부터 마나 공급이 끊겼다는 의미.

그 말은 비블로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맞이한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 * *

레오폴드 기사단이 도착한 건 내가 웨일에 도착한 그 다음 날 늦은 저녁이었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붉은 단복을 입고 부복하는 레오폴드 기사단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오랜만에 그들을 봐서 기쁘면서도, 전쟁터로 밀어 넣는 게 미안했다.

기사단의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알도르 경이 아닌 코너 경이라는 것도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새삼 알도르 경의 부재가 크게 와닿았다.

“모두 일어나라.”

일렁이는 감정들을 애써 붙잡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준 뒤, 코너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곳까지 기사단을 이끌고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다들 저를 잘 따라 준 덕분에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피곤할 테니, 다들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푹 쉬도록.”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내일 새벽에 또다시 긴 여정을 떠나야 하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나 역시 침실로 돌아가서 쉬려는데, 프로페테스 4세가 따라붙었다.

“참으로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기사들이군요. 소문으로만 듣던 레오폴드 기사단을 실제로 보게 돼서 영광입니다.”

“레오폴드 기사단이 그렇게 유명한가?”

현재 프로페테스 4세는 제대로 된 작위도 없는, 이름뿐인 귀족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터라 밖에서는 말을 놓기로 했다.

아무리 신분을 위장하고 있다고 해도 국왕이나 되는 자가 타국의 귀족에게 반말을 듣는 건 기분이 나쁠 텐데, 그는 그런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유명하지요. 레오폴드 기사단은 제국의 기사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최정예 기사단이지 않습니까?”

“전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닌 진심으로 말한 거였다.

레오폴드 기사단이 명성을 떨친 건,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의 일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공작이 된 뒤로 레오폴드 기사단의 명성은 많이 떨어졌다.

기사 모집 공고를 냈을 때, 지원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아닙니다. 지금도 레오폴드 기사단 하면 다들 알아주는걸요. 특히 레오폴드 기사단의 은빛 늑대가 유명하죠.”

은빛 늑대. 알도르 경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기껏 알도르 경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감정을 수습했는데, 이렇게 다시 언급되니 기분이 저조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은빛 늑대가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 그는 이번 전투에 참전하지 않는 겁니까?”

“……그래.”

“왜죠? 그가 있으면 좀 더 일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

“피곤하니 수다는 거기까지 떨도록 하지.”

알도르 경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하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눈치가 있는지, 프로페테스 4세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한 거라곤 북부령 귀족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한 것뿐인데, 하루 종일 검술 훈련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니, 무거운 건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 계획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안타까움이 뒤엉켜서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 * *

국왕이 머물기엔 허름하지만, 이름뿐인 귀족이 머물기엔 충분한 방 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알도르 샹크스는 같은 기사 단원과 크게 싸운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충성스러운 보좌관의 보고에 프로페테스 4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것 참 이상하군.”

알도르 샹크스.

은빛 늑대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한 그의 실력을 눈여겨본 여러 기사단에서, 심지어 제국의 황실 기사단에서도 그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었다.

그러나 알도르는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버릴 수 없다며,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레오폴드 기사단에 뿌리를 박았다.

그런 그가 고작 기사단원과 싸운 것 때문에 주군을 버리고 홀연히 사라졌다니.

믿기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알도르 샹크스와 싸운 기사가 누구지?”

“에런 몰드라는 남자입니다. 그 역시 알도르 샹크스와 싸운 뒤로 모습을 감췄습니다.”

이러니까 더 수상하잖아.

아델이 특별한 명령을 내려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알도르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녀 역시 알도르가 왜 사라졌는지 모른다는 건데.

“뭐 때문에 두 사람 다 한꺼번에 사라진 걸까?”

보좌관을 내보낸 뒤,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프로페테스 4세는 통신 반지로 수도로 향하고 있을 로고스에게 연락했다.

“……라고 하던데, 혹시 그 남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정말입니까? 정말로 은빛 늑대가 이번 전투에 참전하지 않는 겁니까?]

“아는 게 없군.”

자신보다 먼저 제국에 넘어온 로고스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물어봤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하긴, 제 임무 수행하기도 바빴을 로고스가 다른 곳에 눈을 돌렸을 리가 없지.

[대답해 주십시오, 전하. 은빛 늑대가 정말로 오지 않는 겁니까?]

“그래. 말했잖아. 홀연히 사라졌다고.”

[말도 안 돼. 내가 은빛 늑대랑 검술 대결하는 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이럴 수는 없어.]

로고스가 절규하는 목소리가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로고스가 알도르와 만나는 걸 고대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래서 한곳에 미친 놈들이란.’

평소에는 그런 로고스가 싫지 않지만, 이럴 때는 조금 성가셨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테니, 프로페테스 4세는 혀를 차며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알도르에 대해서 생각했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은빛 늑대 따위 없어도 상관없지.”

그가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아델 레오폴드뿐이었으니까.

프로페테스 4세가 로고스를 비롯한 보좌관들의 만류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웨일까지 온 것도 전부 아델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녀가 힘들어할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어서.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이루는 그때, 프러포즈하기 위해서 이 먼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이게 바로 아델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사소하면서도 개인적인 두 번째 이유였다.

“프러포즈라.”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해지는 건 아델이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두드려 봐야지.”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받아 줄 때까지 몇 번이고 마음의 문을 두드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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