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3화 (237/262)

243화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플랭키 로이드, 아니 프로페테스 4세를 거의 잡아끌다시피 방으로 데리고 온 나는 그를 맹렬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어째서 국왕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는……”

“쉿.”

프로페테스 4세가 능글맞게 웃으며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우리 이야기를 엿듣는 쥐새끼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 호칭은 쓰지 말고 편하게 플랭키라고 불러 주세요.”

그 말에 나는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딱히 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조심하는 게 좋겠지.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요. 공작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왔죠.”

“저와 한 약속에 플랭키 님이 직접 참전하는 조항은 없을 텐데요.”

“참전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없죠.”

분명 그렇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국왕이 직접 참전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적국이 수도까지 쳐들어오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닐뿐더러.

연합군과 함께 있는 게 아닌, 상단 직원들로 위장한 소수의 호위 기사만 데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의 행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죠?”

“으음.”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는 집어치우고 진짜 이유를 말씀하세요.”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프로페테스 4세는 난감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다른 사람들은 잘 속였는데 공작은 속일 수가 없군요.”

“이런 허술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한데요.”

“하하. 로고스 경에게 그 말을 꼭 전해 주겠습니다.”

그 말은 로고스 경은 넘어갔다는 건데, 믿기지 않았다.

내가 아는 로고스 경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모시는 주군을 위험 속에 방치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알도르 경처럼 말이지.

뻗어 나가던 생각의 가지 끝에 알도르 경의 이름이 걸리자, 입 안이 약초라도 씹은 것처럼 썼다.

“안색이 나빠졌습니다.”

그만큼 표정도 어두워졌는지, 프로페테스 4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겁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가 내 이마를 짚으려는 듯 손을 뻗자, 나는 그 손을 쳐 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플랭키 님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시는 바람에 머리가 조금 아픈 것 말고는 아주 멀쩡합니다.”

노골적인 비난에 프로페테스 4세가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저는 무사할 테니까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요.”

“그렇죠. 모르는 거죠.”

순간 그가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인 건, 내 착각인 걸까?

“그래서 무슨 이유로 이번 전쟁에 직접 참전하신 겁니까?”

“음, 일단 제가 직접 참전한 데에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죠?”

“첫 번째 이유는 연합국에 속한 다른 왕국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국을 침공하는 데 힘을 보태는 대신, 제가 직접 참전하길 바란다는 조건을 걸었거든요.”

“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이란 말인가.

아니, 잠깐만.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지금 말씀하시는 거죠?”

그동안 작전 회의 겸 상황 파악을 위해 그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이런 내용은 없었다.

그는 항상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고.

실제로 위조 금화나 제국 침공 등은 계획대로 진행됐던 터라 나는 그의 말을 믿었었다.

그런데 저런 비하인드가 숨겨져 있었다고 하니, 황당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공작은 분명 안 된다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겠지요.”

“물론이죠.”

“그래서입니다.”

프로페테스 4세가 쓰게 웃었다.

“다른 방법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그사이에 혹 제국에서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 공작에게 말하지 못한 겁니다.”

“…….”

“만약 공작이 제 입장이었더라도, 저와 같은 선택을 했을 테지요.”

그렇지.

구구절절 맞는 말인지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 같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는 뭔가요?”

“그건 비밀입니다.”

말해 줄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웬 비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자, 그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두 번째 이유는 아주 사소한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더욱 말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라서요.”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출전 이유라.

더욱 궁금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요. 플랭키 님이 참전하신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

“하하, 이해해 줘서 감사……”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는요?”

프로페테스 4세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한순간 사라졌다.

그는 볼을 긁적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공작은 어느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요. 뭐 ……들지만.”

마지막에는 거의 뭉개다시피 말한 탓에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공작과 함께 제국의 수도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히는 황궁이겠군요.”

“황관이 탐나시는 겁니까?”

그래서 직접 황궁으로 가려는 건가?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제가 황궁으로 가려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이죠?”

“레오폴드 영지를 제국은 물론 연합국에서도 완전히 독립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제국이 함락되면 제국의 모든 영토는 기여도에 따라 나눠 가지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모든 이들이 가장 탐내는 영토는 레오폴드 영지지요.”

그렇겠지.

레오폴드 영지에는 퓨라가 대량으로 생산되니까.

“공작이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다고 해도, 레오폴드 영지는 제국의 영토이니 전리품으로 쳐야 한다고 다른 왕국들이 우길 가능성이 큽니다.”

이 부분은 나 역시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프로페테스 4세는 계약서를 썼으니 걱정 없지만, 다른 왕국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황궁을 칠 때, 아르티나 왕국을 비롯한 다른 왕국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한 거였다.

로고스 경이 이끄는 아르티나 군대의 도움을 조금 받긴 할 거지만, 황도로 들어가는 건 오로지 레오폴드 기사단뿐이었다.

그래야 이번 전쟁에서 내 공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테니까.

“그러니 그 전에 레오폴드 영지를 독립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걸 가지고 레오폴드 영지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려 했는데, 프로페테스 4세가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저야 그래 주시면 좋지만, 다른 왕국들이 인정할지가 의문이네요.”

“상관없습니다. 제국이 함락되기 전에 레오폴드 영지가 독립하면, 그곳은 절대 전리품이 될 수 없으니까요.”

과연 그게 말처럼 쉬울까.

걱정됐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설령 잘못되더라도 내가 딱히 손해 볼 건 없기도 했고.

게다가 여기까지 온 그를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죠.”

* * *

타악-

최대한 조심스럽게 착지했음에도, 소리가 약간 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페르데스는 황급히 근처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기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페르데스는 좀 더 주변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황태자 궁으로 들어갔다.

페르데스가 주인이 없는 궁을 몰래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 알도르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황제 쪽을 조사하는 편이 좀 더 확실하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황제 쪽은 보안이 너무 철저해서 파헤치기가 어려웠다.

반면 황태자 쪽은 생각보다 빈틈이 많았다.

그만큼 가진 정보가 얼마 없다는 의미겠지만, 뭐든 해 보자는 생각으로 그의 궁에 잠입한 것.

마침 황태자가 궁을 비우면서 경비가 느슨해져, 잠입하기가 용이했다.

황태자의 서재까지 순조롭게 숨어든 페르데스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 책상을 뒤졌다.

하지만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3개의 서랍 중 2개는 잠겨 있었으며.

유일하게 열려 있는 서랍에는 편지지, 봉투, 잉크 등 잡동사니만 들어 있었다.

“나머지 서랍을 열어 봐야 할 것 같은데.”

전쟁터에 서랍 열쇠를 가지고 가진 않았을 테니, 분명 근처에 숨겨 뒀을 터.

“여기 있다.”

화병 밑에 숨겨진 열쇠를 발견한 페르데스는 곧장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무슨 책이길래 서랍에 넣어 둔 거지?

페르데스는 곧바로 책을 꺼내 확인했다.

[악마, 그 심오한 존재.]

제목부터 불길한 느낌이 팍팍 풍겼다.

페르데스는 며칠 전, 비블로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설마……황제가 악마와 계약을 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황궁에는 신전에서 쳐 둔 성스러운 결계가 있으니, 만약 황제가 악마와 계약을 했다면 신전 측에서 바로 눈치챘을 거다.” 

“그렇다면 악마 말고 다른 존재가 황제와 계약했다는 거군요.”

아델의 말에 비블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볼로스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강한 놈인 건 분명해.”

그의 설명에 한순간 심각했던 분위기는.

“물론 나보다 강하지는 않겠지만.”

비블로스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금방 풀어졌지만, 그때 나눈 대화는 페르데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태자의 서랍에서 악마와 관련된 책이 나오다니.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비블로스의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어.’

그리 판단한 페르데스는 문제의 책을 챙겨 들고, 곧바로 황태자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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