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그랬더니 황후가 발악하면서 뭘 봤냐고 루센 공작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뭐야.]
페르데스에게 뭔가 알아내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조금 놀라우면서도, 그만큼 페르데스가 신경 써서 잘해 주고 있다는 의미이니 고맙고 대견했다.
[듣자 하니 황후도 황제랑 황태자가 작당해서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그가 말해 준 이야기들은 놀라웠고.
[황후가 그 부분에 대해서 그대한테 말한 적이 있다며?]
“그랬었죠.”
그러니 페르데스랑 파혼해 달라고 말했었지.
[나한테 미리 말해 줬으면, 놀라지 않고 바로 대응했을 텐데.]
“죄송해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내용인지라, 저도 깜빡 잊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 페르데스가 들으면 몹시 기분 나빠할 이야기니,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였다.
황후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페르데스에게 말을 할 리가 없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한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루센 공작이 전부 다 말했나요?”
[일단은. 알도르 샹크티스가 그대를 배신하고 황제 쪽에 붙었다는 것과 최근 황태자 궁에서 본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갑자기 머릿속에 울리던 대화가 끊겼다.
누가 와서 그런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미니 드래곤을 톡톡, 건드리며 그를 불렀다.
“페르데스 님?”
[……이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무 놀라지 말고.]
도대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네. 마음의 준비 다 됐어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알도르 경이 디아볼로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큼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자 말이야. 황제 쪽에 붙은 지 오래된 것 같아.]
놀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전부 내 착각이었다.
순간 숨을 쉬는 게 잊을 정도로 정신이 멍해졌다.
바보같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머릿속에 흘러 들어왔다.
[괜찮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며, 되물었다.
“오래됐다는 게…… 무슨 소리죠?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알도르 경이 황제 쪽에 붙었다는 건데요?”
[루센 공작이 말한 바에 의하면,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살아 있었을 때부터인 것 같아.]
……뭐?
[아마 황제는 그대의 부친부터 지속적으로 레오폴드 공작가를 감시했고, 그 남자는 황제가 붙여 둔 감시역 중 하나였을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뒤늦게 객실 밖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는지, 반응은 없었다.
“알도르 경은 그 누구보다 충직한 아버지의 기사였어요.”
나의 기사이기도 하고.
“그런 그가…… 황제의 감시역이었을 리가 없어요. 아버지를, 가문을 배신했을 리가 없다고요!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흥분한 나와 달리 페르데스는 침착했다.
[그래서 더욱 그가 황제 쪽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니, 정확히는 붙은 척한 거겠지만.]
“붙은 척……?”
[그래. 그대가 나한테 황제 편인 척하며 이중 첩자 노릇을 해 달라고 부탁한 것처럼 말이지.]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 들어온 이야기는 혼란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로 가득 찼던 머릿속을 점차 맑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알도르 경이 이중 첩자 노릇을 했다는 건가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봤을 때는 그런 것 같아. 물론 내 생각일 뿐, 확실한 건 아니야.]
그러니 너무 믿지 말라고 페르데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확실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매우 높긴 했다.
황제가 지난 생과 달리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고 잠잠했던 것도 알도르 경이 중간에서 조율해 준 거라고 생각하면 전부 이해되기도 했고.
물론 이래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가령 두 번째 생에서 나랑 결혼한 거라던가.
이중 첩자 노릇을 자처한 이유라던가 등등.
많은 것들이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은 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들이었다.
“알도르 경을 만나고 싶네요.”
그래야 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페르데스도 나랑 같은 생각인지 깊게 공감했다.
[하여간 루센 공작이 알려 준 건 그게 전부야. 뭔가 더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건 아무리 협박해도 말을 안 해 주더라. 미안.]
“어째서 페르데스 님이 사과하시나요. 최선을 다하셨는데.”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러고 보니 루센 공작을 협박한 내용이 조금 이상했던 것 같던데.
“루센 공작이 불법 카지노에 있는 건 언제 보신 거예요?”
[본 적 없어.]
“네? 하지만 분명 그걸로 협박했다고…….”
[그냥 짚어 본 거야. 그 남자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건, 황제나 황태자의 행보를 계속 주시했다는 거니까 불법 카지노도 갔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 그렇겠구나.
페르데스가 짚어 주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걸로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황후가 나서 준 거야. 뭐, 덕분에 일이 더 잘 풀렸지만.]
“그러게요.”
이렇게 황후의 도움을 받을 줄은 나 역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나저나 황후가 그렇게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도 공론화하지 않는 건 황태자 때문이겠지.
황제의 죄목을 낱낱이 밝히면, 그의 개처럼 활동한 황태자 역시 벌을 피하지 못할 테니까.
하나 남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황후가 미련하게 느껴지면서도, 조금은 가여웠다.
[내가 알아낸 건 여기까지야. 또 뭔가 알아내면 연락할게.]
“부탁드릴게요.”
연락은 거기서 끝이었다.
제 역할을 마친 페어리는 깊은 잠이 들었다.
나는 페어리를 의자에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변화하는 창밖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머릿속이 복잡하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도르 경이 그동안 했던 말과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착잡한 마음이 점점 커져 갔다.
알도르 경.
부디 나와 가문을 배신한 게 아니길 간절히 바랄게요.
간절한 바람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기차를 타고 하루하고 반나절을 꼬박 달려, 목적지인 웨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레오폴드 기사단을 비롯한 다른 북부령 귀족들의 기사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기차역에는 웨일 백작이 보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나와 마티나 백작은 그 마차를 타고 웨일 백작저로 향했다.
“영지가 어수선하군요.”
창밖으로 영지의 상황을 살핀 마티나 백작이 말했다.
“용병들도 제법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용병들을 고용하다니. 웨일 백작도 조금 경솔한 것 같군요.”
“어쩔 수 없지. 연합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영지를 지키려면 용병들이 필요하니까.”
“그런 거라면 다른 영지에 지원 요청을 하는 게 좀 더 안전했을 텐데요.”
“다른 영지도 마찬가지로 불안한 상황인데 지원군을 보내 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도 안타깝다며 마티나 백작이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마티나 백작은 마음이 여리다니까.
제국을 무너뜨리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북쪽령 기사단들은 어느 정도 도착한 거지?”
나는 대화의 주제를 돌리면서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물었다.
“절반 정도 도착했습니다. 이변이 없다면 다른 기사단도 내일 오전 중으로 전부 도착할 겁니다.”
“그럼 하루 정도 휴식하고, 모레 출발하면 되겠네. 분대는 이전에 내가 말한 대로 나누고…….”
앞으로의 계획을 되짚고, 다른 의견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웨일 백작저에 도착했다.
“웨일 백작령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공작 각하.”
웨일 백작 내외가 정문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기차역까지 마중 나갔어야 했는데 다른 손님들이 많이 오신 관계로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백작 내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미리 도착한 북부령 귀족들이 앞다투어 다가와 인사했다.
“오셨군요, 각하.”
“저는 이번에 탈환전에 참가한…….”
조금 정신없네.
긴 기차 여행으로 피곤하기도 했다.
“공작 각하.”
적당히 대응해 주고 쉬러 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하아, 이번에는 또 누구야.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은색 모노클을 쓴 미청년이 보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뒤늦게 미청년이 누군지 떠오른 나는 기함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미청년의 눈매가 예쁘게 휘었다.
그는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더니,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로이드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플랭키 로이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