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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화 (234/262)

240화

어두컴컴한 방 안.

“제발 명을 거둬 주십시오, 폐하.”

황태자는 황제의 발밑에 납작 엎드려, 애원하는 중이었다.

“저는 폐하의 명령을 수행할 자신이 없습니다.”

눈물 젖은 얼굴이 애처로웠다.

“체르노서도, 아나토메 친위대도 하지 못한 일을 어찌 제가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해 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겁을 내는 게냐. 나약한 녀석 같으니.”

황제, 다이몬이 몹시 언짢다는 듯 혀를 차자 황태자는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다.

다이몬이 화내는 것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죽는 거였다.

죽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황제의 개처럼 살았는데, 갑자기 사지로 등을 떠미니 몹시 당황스러우면서도 두려웠다.

제 이용 가치가 떨어진 걸까.

그럴 리가 없다. 황제에게는 아직 자신이 필요했다.

그 증거로 최근 대외적인 모든 일에 자신을 대신 내보내지 않았던가.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겁에 질린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니며, 다이몬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하지 말거라.”

다이몬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상냥하게 웃으며 황태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행착오는 이미 끝났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죽는 일은 없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하면 돼.”

“정말……입니까?”

“물론. 무엇보다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직 내겐 네가 필요하다는 걸.”

그건 그렇지.

새삼 자각한 사실에 마냥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거라. 이번 일만 성공하면 모든 게 끝나니, 약속한 대로 네게 황위를 물려주마.”

거기다 황위까지 물려준다고 하니,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제가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그래, 믿겠다.”

황태자가 떠난 뒤, 다이몬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고집불통인 데다가, 제게 충성한다면서 정작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는 놈을 처리했으니, 이제 제 앞길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설마 그의 딸이 복병이 될 줄이야.

그 남자의 딸이니 고집이 세고, 어느 정도 검을 다룰 줄 알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나토메 친위대가 맥없이 당할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자만했어.”

이렇게까지 제 발목을 잡을 줄 알았다면 진작 처리하는 건데.

아니, 그래도 처리하지 못했으려나.

그 힘을 온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어찌 됐건 간에 레오폴드 혈족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황자를 붙여 자식을 보게 하려고 했는데, 페르데스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 외에 다른 방법들도 전부 실패했고.

“하여간 하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짜증스레 혀를 차던 다이몬은 문득 손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인상을 쓰며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새카맣게 변한 손이 보였다.

손뿐만 아니라 어깨, 쇄골, 다리 등, 몸 군데군데가 어둠에 잡아먹힌 상태였다.

그만큼 힘을 많이 썼다는 증거이자, 남은 시간이 많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이몬이 그간 황태자에게 정치적인 것들을 일임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다이몬은 새카맣게 변한 손을 불끈,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드디어 얻을 수 있어.”

그토록 갈망하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을.

* * *

드디어 출전의 날, 아침이 밝았다.

정확히는 서부령으로 오고 있을 레오폴드 기사단을 비롯한 북부령 기사단과 합류하러 가는 거였다.

원래는 황실 기사단도 함께 갈 예정이었지만, 총사령관이 페르데스에서 황태자로 바뀌면서 따로 준비해야 할 게 많아 반나절 정도 늦춰졌다.

“아무리 연합국이 영지를 강탈한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지만, 너무 느긋한 거 아니야?”

그 소식을 들은 페르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자신들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연합국이 전부 합심해서 덤벼도 이길 자신이 있는데, 연합국의 절반 가까이가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가.”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 것 치고 영지를 빼앗겼을 때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그렇겠죠. 한 곳도 아니고, 무려 다섯 곳을 동시에 빼앗긴 데다가, 전부 무혈입성이었으니까요.”

나는 대답하며 넥타이를 달라는 의미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되레 넥타이를 가져가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 줄게.”

“제가 해도 돼요.”

“아니. 내가 할래.”

괜찮다는데도 계속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맡겼다.

페르데스는 넥타이뿐만 아니라 커프스단추도 채워 주고, 외투도 입혀 주었다.

“너무 호강하는 것 같은데요.”

“이 정도가 무슨 호강이야. 당연한 거지.”

페르데스가 외투의 단추를 잠그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대에게 더 좋은 걸 해 주고 싶은데, 이 정도밖에 해 주지 못해서 아쉬울 지경이야.”

빈말이 아니라는 건 그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제가 출전하는 게 많이 신경 쓰이시나 봐요.”

“신경 쓰이지.”

그는 단추를 잠근다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걱정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약혼녀가 위험한 전쟁터에 나간다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괜찮아요. 제가 직접 탈환전에 참여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대신 다른 전쟁을 할 거잖아. 어쩌면 그것보다 더 위험한 일을 말이지.”

그렇긴 하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옷깃을 다듬어 주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럴게요.”

“그 어떤 경우라도 그대의 목숨을 우선시해야 해.”

“그럼요.”

“대답은 잘하지.”

“정말로 그럴 거예요.”

애초에 이러는 것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페르데스 님이야말로 제가 말한 거, 절대 잊으시면 안 돼요.”

“물론. 마침표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하셔야지요.”

“네, 네. 누구의 명령인데, 당연히 수행해야지요.”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이 얄미워 옆구리를 쿡 찌르자, 페르데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그대가 말한 건 전부 지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화장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드래곤 형태의 페어리를 가리켰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로 즉시 연락할게.”

페르데스는 내가 준 마법 통신 반지를 알도르 경을 찾는 에런 경에게 줬다고 했다.

그건 확실히 잘한 일이었으나, 그 바람에 그와 연락할 수단이 없어졌으니 난감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하는데, 뜻밖에도 비블로스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 거라면 내 페어리를 빌려주지.”

라고.

페어리를 통해 이야기하면 중간에 비블로스가 들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절대로 황제나 다른 놈들에게 이야기를 흘릴 드래곤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마법 통신 반지는 페르데스에게 넘겨주었다.

출정하면 그쪽 일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하기도 하고.

알도르 경을 찾는 건 전적으로 페르데스에게 일임했으니, 넘겨주는 게 맞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뭔가 알아낸 게 있으면 바로 알려 주세요. 그리고…….”

떠나기 전, 이미 말했던 것들을 재차 강조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마티나 백작이었다.

“각하.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래. 곧바로 나가마.”

마티나 백작이 나가고, 나는 페르데스에게 인사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잠깐만.”

곧장 나가려는데, 페르데스가 내 양쪽 어깨를 잡았다.

“……!”

곧이어 이마에 따뜻하고 말캉한 감촉이 닿자, 나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신관들이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 이마에 입을 맞추잖아.”

페르데스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혔다.

“그래서 한 번 따라해 봤어. 그대에게 축복이 내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지.”

“……페르데스 님은 신관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신관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축복해 주는 건, 보통 아기들에게 해 주는 거였다.

그조차도 말이 많아서 최근에는 거의 하지 않는 추세였고.

그런데 저런 말을 하니 황당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부위는 뜨거웠고.

만지고 싶었지만, 그러면 신경 쓰고 있는 게 너무 티가 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래도 그대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크니, 어느 정도는 축복이 됐을 거야.”

“……말씀은 잘하시네요.”

“칭찬 고마워.”

칭찬이 아닌데.

내가 눈을 흘기자, 페르데스는 더욱 뻔뻔하게 다가오더니 날 끌어안았다.

“기다리고 있을게.”

약간 놀라며 그를 밀어내려다 멈칫했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 모두 이루고, 무사히 돌아와.”

절절한 목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가 눈에 밟혔고.

“네.”

나는 그를 밀어내려던 손으로 등을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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