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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 (233/262)

239화

갑자기 웬 사과?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 그래서 날 믿지 못하는 그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아, 내가 머뭇거려서 오해를 한 거구나.

그런 게 아니라고, 단순히 걱정돼서 그런 것뿐이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지? 어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걸까.

“그런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주면 안 될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바보처럼 가만히 있는 사이 페르데스의 간곡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게. 내가 알게 된 건 전부 다, 마침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말할 테니까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줘.”

그 순간,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페르데스가 또 거짓말을 할까 봐 두려웠던 거구나.

물론 나를 위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페르데스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배신 역시 거짓말의 일종이니, 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내 목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델.”

하지만 믿어야 해.

아니, 믿고 싶었다.

그마저도 믿지 못한다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무엇보다 내게 시간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유가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페르데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는 입술을 한껏 끌어 올리며 함박웃음을 짓더니, 와락 날 끌어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긴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익숙한 체취가 폐부 깊은 곳까지 파고들면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건드렸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러나 절대 깨달아서는 안 되는 감정.

“놔, 놔주세요!”

그 감정이 깨어나려고 하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밀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세게 밀었는지, 페르데스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페르데스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눈썹을 찡그리는 걸 보아하니,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죄송해요.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아니야. 오히려 갑자기 끌어안은 내가 미안하지.”

성추행범으로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다면서, 페르데스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었다.

덕분에 나도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루센 공작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죠?”

“응. 일단 공작을 만나야 그 남자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중앙 홀에 가시면 될 거예요. 탈환전에서 쓰이는 예산 때문에 한창 회의 중일 테니까요.”

“아하, 좋은 정보 고마워. 하마터면 루센 공작저까지 갈 뻔했어.”

“아니에요. 그것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알도르 경을 찾는 거 말이에요.”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페르데스 님을 못 믿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걱정돼서 물어본 거예요.”

나는 그가 괜한 오해를 할세라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기도 하고, 시간이 없는 건 페르데스 님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페르데스는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으니까.

그 역시 내일,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서부령으로 가야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총사령관직을 버리려고.”

“무리예요. 황제가 허락할 리가 없어요.”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지.”

“그게 가능해요?”

의아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물론 가능해.”

장난기가 넘치면서도 의미심장한 미소.

“바로 이렇게 하면 말이지.”

* * *

“크흠.”

코룸 자작은 불편한 기색이 고스란히 담긴 헛기침을 하며 봄의 궁을 올려다봤다.

원수부의 말단 관리로서, 탈환전 때문에 한참 바쁠 그가 이곳에 찾아온 건 페르데스에게 회의 내용을 정리한 서류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냥 얌전히 앉아 있을 것이지.”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회의 도중에 박차고 나가기는.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황자야.”

그런 황자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코룸 자작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대충 서류만 던져 주고, 얼른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봄의 궁으로 들어온 그때.

“다, 당장 잡아!”

“황자 전하! 제발 멈춰 주세요!”

봄의 궁 안쪽에서 작은 소동이 들렸다.

‘무슨 일이지?’

황자 전하라고 외치는 걸 보아하니, 페르데스가 무슨 사고라도 친 것 같은데.

코룸 자작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봤다.

그러자 옷은 반쯤 풀어 헤치고, 머리는 까치집을 지은 듯 산발을 한 채, 복도를 달리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그 뒤에는 궁정인들이 아연실색하며 따라가고 있었고.

‘저, 저게 뭐야!’

처음 보는 기괴한 모습에 코룸 자작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어느새 코룸 자작의 앞까지 달려온 페르데스는 입술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더니, 그가 들고 있던 서류들을 몽땅 가져갔다.

“눈이다!”

그리고 서류들을 갈기갈기 찢어 눈처럼 하늘에 뿌렸다.

“아, 안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코룸 자작이 서류를 빼앗다시피 다시 가져왔지만, 이미 절반 이상이 찢긴 후였다.

이에 코룸 자작은 절규하며 바닥에 쓰러졌고, 페르데스는 그런 코룸 자작이 재미있다는 듯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다.

“드다어 잡았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황자 전하!”

“황궁의는 아직 멀었는가!”

서류가 희생해 준 덕분에 지긋지긋한 술래잡기를 끝낼 수 있게 된 궁정인들은 냉큼 페르데스를 데리고 돌아갔다.

다른 궁정인이 바닥에 떨어진 서류 조각들을 주워 코룸 자작에게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자작님.”

“……하나도 안 괜찮아.”

몇 시간 동안 열심히 작성한 서류들이 한순간 휴지 조각이 됐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방금 그건 도대체 뭔가! 4황자 전하께서 도대체 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확실한 건 황궁의가 진찰해 봐야 알겠지만, 지금 상황만 봤을 땐 백치병이 다시 도진 것 같습니다.”

백치병이라니.

내일 당장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탈환전에 나서야 할 총사령관이 백치병이라니!

물론 페르데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투대의 깃발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을 거지만, 그래도 총사령관이 백치병에 걸린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치명적인 흠이었다.

“당장, 당장 회의를 소집해야겠어.”

코룸 자작은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중앙 궁으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4황자가 다시 백치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황궁 내에 쫙 퍼졌고.

소문이 퍼진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황제는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총사령관을 페르데스에서 황태자로 변경했다.

* * *

페르데스가 가지 못하게 됐으니, 다른 황자 중에서 한 명이 가게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설마 그 사람이 황태자가 될 줄이야.

“의외네요.”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에 페르데스가 반응했다.

“그러게. 나는 3황자가 갈 줄 알았는데.”

“저는 5황자요. 3황자는 후작위를 받고 황궁을 나갔으니, 보내기 애매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괜히 3황자를 보냈다가 공이라도 세우면, 후작가에 큰 힘을 실어 주는 꼴이 되니까.”

아무리 황제파 가문이라고 해도, 귀족 가문에서 큰 힘을 가지는 건 황실 입장에서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황제가 페르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했을 때 더욱 의아했던 거고.

“어쨌거나 몹시 수상쩍었던 황태자가 출전한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전쟁터라면 감시하기 쉬우니까요.”

“직접 감시하려고?”

“사람만 붙여 둘 거예요. 황태자가 움직인다면 그의 시중을 들 사람들도 여럿 붙을 테니까요.”

페르데스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시네요.”

“그런가.”

무안했는지, 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보다 에런 경이 황태자를 쫓고 있었다고 했죠?”

“정확히는 그 남자를 쫓고 있었는데, 그 장소에 황태자가 나타난 거야.”

“그럼 황태자랑 알도르 경이 같이 있다는 건가요?”

“아마도. 그 남자가 정말로 디아볼로스에 걸렸다면, 시전자는 황제일 테니까.”

[황제가 인간이 아닌 건가?]

난데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자, 나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살펴봤다.

“뭐야. 방금 그 목소리는.”

페르데스도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비블로스 님의 목소리 같았는데.”

“맞아요. 페어리를 통해서 말을 거시는 거예요.”

“페어리라고?”

[그래, 페어리다.]

또 한 번, 목소리가 머릿속에 파고들더니 벽난로 위에 앉아 있던 인형이 움직였다.

[넌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나.]

아, 인형이 아니라 대현자의 페어리였구나.

짧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온 대현자가 페르데스의 어깨 위에 앉았다.

[그래서, 그 황제라는 놈은 인간이 아닌 건가?]

“제가 알기로는 인간입니다.”

페르데스가 대답했다.

“그 증거로 그의 아들인 제가 인간이니까요.”

[그럼 디아볼로스를 시전한 놈은 황제가 아니야. 애초에 인간은 디아볼로스를 시전할 수 없으니까.]

“그럼 누가 범인이라는 거죠? 황제 말고 범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는데요.”

다른 그렇다고 해도 아나토메 친위대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그런 황제가 범인이 아니라고 하니 당황해서 묻자, 대현자가 혀를 찼다.

[나는 황제가 디아볼로스를 시전했을 리가 없다고 했지, 그 녀석이 범인이 아니라곤 한 적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죠?”

대현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와 달리 페르데스는 경직된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황제가 악마와 계약을 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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