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에런과 헤어진 페르데스는 곧바로 지하 통로로 향했다.
들어올 때는 길을 찾느라 걸음이 느렸지만, 나갈 때는 아니었다.
길을 전부 알고 있으니, 페르데스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지하 통로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이대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기를.
페르데스는 간절히 바랐지만, 그의 바람은 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저마다 손에 무기를 쥔 건장한 남자들이 미로의 출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봐도 그 수가 다섯은 훌쩍 넘었다.
수적으로도 불리한 데다가 무기까지 들고 있으니, 섣불리 덤빌 수가 없었다.
“안을 수색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녀석이 가면까지 들고 간 걸 보면, 지하 통로의 미로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일리가 있군. 그럼 팀을 나눠서 조사해 보도록 하지.”
설상가상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페르데스는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어떡하지?’
카지노 쪽으로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정면 돌파할 것인가.
땀이 차오른 손을 불끈 쥐며 고민하던 페르데스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카지노보다는 이곳을 지키는 경비가 훨씬 적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좋아.’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들을 향해 돌진하려는 그때.
타악, 탁-
“컥!”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외마디의 비명이 지하 통로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에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갑자기 난입해서 남자들을 제압하는 인영을 바라봤다.
인영은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으나, 페르데스는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쿵, 쿵-
심장이 이렇게 요란하게 뛰며,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려 주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들을 제압한 인영이 페르데스 쪽을 돌아봤다.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가 걱정스레 그를 응시했고, 새하얀 손이 그를 향해 뻗어졌다.
“괜찮으세요?”
그런 아델의 등 뒤로 밝은 후광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막 강림한 천사 같았다.
“페르데스 님?”
아니, 천사보다 더 대단한 존재지.
그녀는 내 구세주니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단 한 번이라도 아델이 구세주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페르데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델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 * *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끄응.
페르데스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델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 초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회피했다.
“페르데스 님.”
그녀가 제 이름을 불렀을 땐, 죄인처럼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이제 말해 보세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어째서 그런 곳에 계셨던 거죠?”
“그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델의 지적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페르데스의 가슴에 꽂혔다.
진짜 거짓말을 하려던 게 아닌, 이미 거짓말을 한 게 있어 양심이 찔린 것이다.
아델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군요.”
페르데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왜 놀라신 거예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던 거야.”
처음부터 설명하자니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질 것 같고.
간략하게 요점만 말하자니, 아델이 오해를 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저한테 숨기고 있는 게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건 아니야.”
페르데스가 즉각 부인하자, 아델이 입술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그 말은 숨기는 게 있긴 있다는 거네요.”
페르데스는 차마 이번에도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델은 그런 페르데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 쪽으로 상체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전에 알도르 경이 레오폴드 영지에 잘 있다고 하셨죠.”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페르데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다시 물을게요.”
“…….”
“정말로 알도르 경이 레오폴드 영지에 있었나요?”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 말투.
페르데스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 머리를 짚었다.
전부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알도르가 디아볼로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아델에게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단지 루센 공작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뒤, 말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순서가 바뀌고 말았다.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델에게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페르데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아델을 바라봤다.
“아니, 없었어.”
이미 짐작했던 사실이라서 그런지, 아델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초록색 눈동자가 강력하게 상황 설명을 원하고 있었다.
진짜 말해야 할 순간이 왔구나.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나,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긴장됐다.
그녀에게 이미 거짓말을 한 터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된 거냐면……”
페르데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했다.
* * *
알도르 경이 레오폴드 영지에 없다는 건 이미 짐작했던 사실인지라,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 외의 사건들이었다.
알도르 경이 기차에서 수상쩍은 남자랑 대화했다는 거나, 그래서 에런 경과 싸웠다는 것.
그 뒤로 두 사람 다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 등등, 온통 당황스러운 이야기들 뿐이었지만, 가장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알도르 경이…… 디아볼로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래.”
부디 내가 잘못 들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이뤄지지 않았다.
충격과 혼돈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아니 믿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부정했다.
“알도르 경이 디아볼로스에 걸렸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어요.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페르데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도 아니길 바라지만 에런 경의 말을 들어 봤을 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커. 그게 아니라면 그 남자가 널 배신했을 리가 없잖아.”
배신.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지 않으면 폐하께서 제 동생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 단어를 들으니, 세 번째 생에서 겪었던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전속 시녀로 둘 만큼 믿었던 아이가 날 배신하고 독살했던 끔찍했던 그 일이!
더 끔찍한 건, 전속 하녀가 어느 순간부터 알도르 경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설마, 아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도르 경이 나를 배신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절대 아니라고, 차라리 알도르 경이 디아볼로스에 걸린 것이기를 바라면서도.
이런 걸 바라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한기와 두려움에 잠식된 몸이 부질없이 떨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애써 두려움을 떨쳐 내고 있는데,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페르데스가 나를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 남자가 그대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거기다 확신에 찬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마냥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덕분에 몸을 휘감고 있던 한기와 두려움을 몰아낸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 상태로 흐트러진 숨을 고르고 있자, 페르데스가 계속 내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진정됐어?”
“덕분에요.”
“다행이네.”
“……다행은 아니죠.”
나는 고개를 들고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황급히 내 시선을 피했다.
“왜 제 눈을 피하세요?”
“…….”
“혹시 저한테 거짓말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움찔하는 걸 보니, 정곡을 찔렀나 보네.
“그러길래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바로 루센 공작을 만나러 갔을 거 아니야.”
그렇겠지. 알도르 경의 행방을 알아야 하니까.
“그래서 말하지 못했던 거야. 그대가 위험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어차피 시기가 조금 늦춰진 것뿐이에요.”
위험에 처한 알도르 경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루센 공작을 만나야겠어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나 볼게. 그리고 알도르 경을 찾는 것도 나한테 맡겨 줘.”
“그럴 수는…….”
“어차피 그대는 다른 일로 바쁘잖아.”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사실이었다.
당장 내일 탈환전 때문에 서부령으로 가야 하는지라, 알도르 경을 찾는 데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신경 쓸 여력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페르데스에게 맡겨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랬다가 그까지 위험에 처하면 어떡하지.
걱정돼서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페르데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