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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화 (231/262)

237화

페르데스가 제 이름을 부르자 에런은 멈칫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새하얀 가면을 쓴 데다가 머리색도 평소와 달라서, 지금까지 그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페르데스는 단번에 자신인 걸 알아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를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페르데스가 그의 손을 쳐 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런을 담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너도 내가 누군지 알아봤잖아?”

“그야 황금색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흔하지 않을 뿐,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고 있던 에런은 페르데스가 황태자 쪽으로 다가가자, 비로소 확신하고 그를 붙잡은 것.

페르데스 쪽으로 바짝 다가와 붙은 에런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의심스러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

“그 녀석을 찾을 때까지, 그 녀석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전부 알아낼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런이 말하는 그 녀석이 알도르 샹크티스라는 걸 바로 눈치챈 페르데스가 반문했다.

“도대체 그 녀석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차역에서 왜 싸운 거냐.”

“그게 무슨……. 편지를 보고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편지?”

페르데스의 질문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페르데스는 물론 에런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침묵한 것이다.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인기척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티나 영지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 녀석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웬 놈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편지를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곳에 온 건지, 그리고 뭘 알고 있는 건지 묻기보다, 자신이 뭘 보고 들었는지 설명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에런이 빠르게 말했다.

“언제까지 그걸 가져오라던가, 레오폴드 공작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던가, 황태자 전하를 절대 배신하면 안 된다는, 누가 들어도 수상쩍은 내용이었지요.”

대화 내용만 들어 봤을 때, 알도르가 아델을 배신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녀석이 공작 각하를 배신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아델을 향한 알도르의 충성은 페르데스 역시 인정한 바였다.

……물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뭔가 있다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심각한 일이라고 판단한 저는 그 녀석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했지?”

“지금은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라고 하더군요.”

배신했다 혹은 아니다, 가 아니라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뭔가 있군.”

만약 아델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절대 아니라고 말했을 테고, 배신했다면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 녀석을 계속 추궁했습니다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더군요. 자기는 어떤 것도 말해 줄 수 없다고 말이죠.”

“그래서 그 녀석과 싸운 거군.”

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있지만, 이상한 말도 했거든요.”

“이상한 말?”

“나는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지만, 네가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까지는 말릴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페르데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알도르가 했다는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에런에게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보는 건 말리지 않는다.

그 말인즉, 에런에게 무슨 일인지 알려 주고 싶다는 건데, 입막음을 당해서 말할 수 없다는 거겠지.

입막음.

그 단어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디아볼로스가 떠올랐다.

설마 알도르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아무래도 제 두 눈으로 직접 보라는 것 같아, 지금까지 그 녀석을 따라다닌 겁니다.”

페르데스가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에런의 말은 계속됐다.

“그렇게 수도까지는 쫓아왔는데……. 바보 같이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그 녀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

“어떻게 찾으면 좋을지 고민하던 와중, 불법 도박장에서 은발의 근사한 직원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해서 그 녀석을 찾으러 온 겁니다.”

어렵게 불법 도박장에 잠입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알도르로 추정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황태자를 발견한 에런은 황태자와 알도르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를 예의 주시한 것.

“그러던 와중……”

“……내가 등장해서 당황했겠군.”

충격에서 벗어난 페르데스가 말을 가로채자, 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데스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에런에게 물었다.

“왜 이 사실을 진작 아델에게 말하지 않았지?”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작 각하께 편지를 보낸 거고요.”

그러고 보니 초반에 편지를 보고 온 게 아니냐고 물었었지.

“언제 편지를 보냈지?”

“알도르와 싸운 직후입니다. 기차에서 바로 편지를 작성해서 보냈지요.”

그런데 여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메이의 편지처럼 에런이 보낸 편지도 중간에서 누군가 가로챘다는 의미.

‘알도르는 범인이 아니야.’

메이의 편지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만 해도 그가 범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런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개입자가 있다.

그것도 자신들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아주 무시무시한 개입자가.

이것만 해도 거슬리는데, 더욱 거슬리는 건 알도르가 디아볼로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러니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고 말한 거겠지.’

디아볼로스에 걸린 자들은 시전자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 것들을 입 밖으로 뱉는 순간 죽게 되니까.

‘큰일이네.’

예사로운 일이 아닐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생각해 봐야겠어.’

우선 루센 공작을 만나 봐야겠지.

아델에게 그런 쪽지를 보낸 것도 그렇고, 그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루센 공작은 워낙 성가시고 짜증 나는 작자라서 웬만하면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루센 공작저를 찾아가면 그를 만날 수 있으려나.

루센 공작을 만나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황태자의 동태를 살피고자 페르데스는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쳐다봤다.

‘없어?’

아까까지만 해도 저기 앉아서 게임하고 있었는데, 어디를 간 거지?

에런은 봤을 수도 있으니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카지노의 경비로 보이는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건, 마침 옆을 지나가던 직원들이었다.

“옆 건물 1층에서 여기 직원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며?”

“응. 듣자 하니 홀딱 벗고 있었다더라. 가면도 하나 사라졌대.”

“세상에. 그 말은 누군가 직원으로 위장해서 여기 들어왔다는 거야?”

“맞아. 그래서 그놈을 찾는다고 이 난리인 거고.”

결국 들킨 건가.

하긴 에런과 대화하느라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을 오래 끌긴 했다.

에런도 건장한 남자들이 찾는 사람이 페르데스라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

“얼른 나가셔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나갈지 방법은 생각하셨습니까?”

카지노 출구는 건장한 남자들이 지키고 있어, 이용할 수가 없었다.

“비밀 통로를 이용할 거다.”

“비밀 통로라면, 이곳 직원들이 이용하는 곳이요?”

“그래.”

“하지만 그곳은 복잡한 미로라서, 여기 직원들도 오래 다닌 고참이 아니면 길을 잃기 쉽다고 하던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돌아가는 길은 전부 외웠으니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럼 가지.”

같이 가자는 제안에 에런이 고개를 저었다.

“전 그 녀석이 뭘 하려는지 알아낼 때까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나?”

“물론이죠. 하지만 그 녀석이 도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습니다.”

도움 요청, 인가.

하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

에런의 마음을 이해한 페르데스는 좋을 대로 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보낸 편지가 공작 각하께 전해지지 않은 것 같으니, 부디 페르데스 님이 전부 말씀해 주세요.”

“……그래.”

아직 아델에게 전부 말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경도 뭔가 알아낸 게 있으면 즉시 알려 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어떻게 알려 드러야 할지…….”

편지 같은 건 이번처럼 중간에 개입자가 가로챌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고 매번 에런이 직접 보고하러 올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

“이거.”

페르데스는 항상 끼고 다니던 마법 통신 반지를 빼서 에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델과 주고받은 마법 통신 반지다. 이걸로 연락하면 될 거야.”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에런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가, 이내 결연하게 굳었다.

에런은 통신 반지를 꼭 움켜쥐며 다부지게 말했다.

“반드시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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