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28/262)

234화

내가 사납게 되묻자, 직원은 망부석처럼 굳었다.

“방금 뭐라고 했는지 말해라.”

다그치자, 크게 뜨인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방금 한 말은 그게 아닐 텐데.”

“제가 어젯밤에 무슨 좋은 꿈을 꿨길래……?”

“그 전에.”

“공작 각하와 4황자 전하, 두 분을 모두 뵙다니……?”

그래. 바로 이거였다.

이 직원이 황궁 내에 들어왔을 리는 없고.

“4황자 전하께서 이곳에 다녀가신 건가?”

“네, 네. 약 한 시간 전쯤 다녀가셨습니다.”

한 시간이면 얼마 되지 않았네.

그나저나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외출하다니.

평소 페르데스답지 않은 행동인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한테 말하지 못할 일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까.

궁금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대부분 나와 관련된 것이었던지라 더욱 알고 싶었다.

직원에게 대놓고 물어보면 개인 정보라면서 알려 주지 않을 테니, 은근슬쩍 떠봐야겠네.

“그래서 나보고 우체국으로 가라고 하셨구나.”

나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지.”

황궁에도 우체국이 있는데, 구태여 이곳까지 온 걸 보면 다른 사람들에겐 들키면 안 되는 일인 게 분명했다.

직접 움직인 것도 같은 이유겠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도 되고.

그 점을 지적하자, 직원이 몹시 당황하며 말했다.

“그런……! 혹시 황자 전하께 전해 드린 대필 편지가 잘못된 겁니까?”

그냥 한 번 찔러봤을 뿐인데, 직원은 술술 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라올드라는 분이 말한 걸 그대로 적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덧붙이거나, 빠뜨린 내용은 없습니다.”

라올드라면 분명 레오가 쓰는 가명이었다.

요컨대 그 대필 편지는 레오가 보냈다는 의미.

이전에 레오와 연결된 마법 통신 반지를 빌려달라던 것도 그렇고, 몹시 수상쩍었다.

역시 뭔가 있어.

“정말 제대로 적었는지, 확인해봐야겠으니 읊어 보렴.”

“네? 그건…….”

“혹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다행히 그건 아닌지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내용이 간단해서 기억하긴 합니다만, 이건 개인 정보라 남에게 함부로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흐음?”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 말은 나와 페르데스 님이 남이라는 건가?”

페르데스와의 친분을 과시하고자, 일부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페르데스 님의 부탁을 받아서 왔다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뭐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허둥지둥거리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전부 말하겠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필 편지의 내용은 보안상 당사자에게만 말하는 게 원칙이라서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티나 백작을 쳐다봤다.

“전 따로 볼일을 보고 오겠습니다.”

마티나 백작이 눈치껏 자리를 비키자, 직원이 종이에 기억나는 내용들을 적어 내게 내밀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이 정도입니다.”

목격자 발견. 말을 직접 빌려 탄 것으로 봐서 납치 가능성은 적음. 목적지는 알 수 없음. 그 뒤로 행방이 묘연, 인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여기 적힌 내용들로 추측해 보건대, 페르데스는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레오에게 부탁하고, 대필 편지로 보고를 받은 걸 보면 아주 중요한 사람을 찾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알도르 경.

루센 공작이 이상한 말을 했던 것도 그렇고, 페르데스가 애타게 찾는 인물이 알도르 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만약 알도르 경이 사라졌다면, 메이나 잭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을 테니까.

그럼 이건 뭘까.

심각하게 편지를 보고 있는데, 직원이 다급히 말을 붙였다.

“제가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 빠진 내용이 있을 수는 있지만, 덧붙인 내용은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그런 것 같군.”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럼 나도 대필 편지를 보내야 하니, 준비해 주게.”

직원에게 더 알아낼 게 없을뿐더러 이 부분은 나중에 레오에게 물어보면 되니, 이제는 내 볼일을 볼 차례였다.

더 지체했다간 은행이 문을 닫을 수도 있어 서둘러 레오폴드 영지의 우체국과 연결해서 대필 편지를 작성했다.

“……바란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지만, 방금 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알도르 경이 없다면, 코너 경이 대신 준비해서 출발하도록.”

* * *

2년 넘게 검술을 배운 것치고 페르데스의 검술 실력은 형편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기척을 죽이는 방법만큼은 여느 기사 못지않게 제대로 배웠다.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웅크리고 지내 왔던 불운한 과거 시절의 경험이 도움이 된 것이다.

페르데스는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조용히 황태자의 뒤를 쫓았다.

페르데스가 따라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황태자는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빠르게 주변을 쓱 훑어봤다.

누가 봐도 조급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보통 나쁜 짓을 하기 전에 저런 행동을 하던데.

페르데스는 벽 뒤에 숨어 황태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황태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쫓아가면 들킬 수도 있으니, 페르데스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황태자가 들어간 건물 앞에 섰다.

일반 가정집으로 보이지는 않고, 가게라고 하기엔 간판이 없었다.

만약 가게라고 해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런 건물에서 영업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고.

그런데 황태자는 무슨 일로 이곳에 들어간 걸까.

평생 좋은 것만 보고 자랐을 그가 들어갈 만한 곳은 절대 아닌데.

“역시 수상하단 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비블로스가 같이 있었으면 바로 들어갔을 텐데.

새삼 그가 없는 게 아쉬워서 페르데스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아쉬웠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알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혹 창문을 통해 안을 볼 수는 없는지, 페르데스는 건물을 전체적으로 한 바퀴 빙 돌며 확인했다.

창문은 많았지만, 애석하게도 전부 커튼이 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아델에게 말하고, 그녀와 함께 와 볼까?

아니야. 다른 일로 바쁜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할 수는 없지.

그럼 어떡한다.

철컥-

창문을 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 건물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여기 있는 게 들키면 안 된다고 판단한 페르데스는 황급히 벽 뒤로 숨었다.

잠시 후, 두꺼운 철문 너머로 말끔한 옷차림의 두 남자가 나왔다.

“무슨 쓰레기를 버릴 때도 다른 건물로 돌아가야 하냐. 피곤해 죽겠네.”

“그러게. 길도 미로라서 잠시 한눈팔면 이상한 곳으로 빠져서 더욱 피곤한데.”

“내 말이 그거야. 아무리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지만, 이럴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

“그 대신 돈을 많이 주잖아. 그걸로 만족해.”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이 황태자가 들어간 이 건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어 페르데스는 집중해서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콜을 불렀더니 손님이…… 아니냐며…….”

“나는 칩 분배하다가…….”

점점 거리가 멀어진 탓에 대화를 전부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짤막하게 들리는 단어들로 그들의 직업이 카지노 직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카지노라는 건가.

하긴 조금만 더 가면 도박의 거리이니, 카지노가 여기 있는 것도 말이 되긴 하는데…….

페르데스는 남자들이 나온 건물과 황태자가 들어간 건물을 번갈아 보다가, 남자들이 나온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절반 이상이 부서져 있어, 이용할 수가 없었다.

반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멀쩡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위 계단과 달리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계속 사용했다는 의미겠지.’

사용한 사람은 아까 봤던 카지노 직원들일 테고.

페르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 계단을 노려봤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까 봤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들어왔다.

아. 두 명이었으면 조금 곤란했을 수도 있는데, 한 명이라 다행이네.

페르데스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곧 페르데스를 발견한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당신 누구……!”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페르데스는 그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검술은 형편없지만, 체술은 나름 자신 있었다. 검술 훈련을 하며 나름 힘을 키운 덕분이었다.

체격도 남자보다 페르데스가 더 커서, 패대기치기도 쉬웠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데스는 외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남자의 멱살을 다시 잡아 올리며 싱긋 웃었다.

“잠시 이 옷 좀 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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