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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227/262)

233화

“역시 1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단이 출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페르데스는 원수부 귀족들과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오웬을 탈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황궁을 지키는 거니까요.”

“맞습니다. 동부령과 남부령의 귀족들이 기사단을 보내 준다고 했다지만, 그들에게 온전히 황궁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페르데스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고, 원수부 관리들끼리만 떠들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총사령관이라고 해도 어떻냐고 한 번쯤은 물어볼 법도 하건만.

원수부 관리들은 회의하는 내내 페르데스에게 말을 걸지 않는 건 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사실에 페르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서로 원치 않은 일이었으니, 원수부 관리들이나 기사들이 자신을 대접해 줄 거라고, 대접을 받아야겠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피곤하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체면치레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개무시를 할 줄이야.

짜증이 치솟았다.

언제까지 자신을 무시할 건지 지켜보다가 결국 인내심이 바닥 난 페르데스는 거칠게 일어섰다.

드륵, 쾅-

의자가 세게 넘어지면서, 관리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페르데스는 싱긋 웃으며 놀란 혹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관리들에게 말했다.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예? 하오나 아직 회의가…….”

“어차피 아무도 나한테는 의견을 묻지 않는데, 내가 여기 더 있어 봤자 뭐 하겠는가.”

페르데스가 대놓고 지적하자, 무안해진 관리들이 헛기침을 하거나 고개를 돌렸다.

“송구합니다, 황자 전하.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니.”

페르데스는 단호하게 말을 잘라 냈다.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전부 결정되면 서류로 정리해서 가져다주게. 뭐, 자네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것도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지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글쎄. 아닐지, 맞을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

페르데스는 싸늘한 웃음을 남긴 뒤, 회의실을 나왔다.

곧장 중앙궁을 나선 페르데스는 아델이 있는 봄의 궁이 아닌 성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 대여소에서 말과 로브를 빌린 뒤, 우체국으로 향했다.

우체국은 저마다 볼일이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만큼 대기 줄이 길었으나,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르데스는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기다렸다.

“화, 황자 전하?”

그랬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창구에 다가가자마자 정체를 들켰다.

“지, 지금 당장 귀빈실로……!”

“됐고.”

직원이 소란을 피우려고 하자, 페르데스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알아챈 건 한 명이면 족했다.

“편지만 찾고 갈 거니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어떤 편지를 말씀하시는 건지…….”

“발신자는 라올드. 암호는 대륙 최강.”

라올드는 레오의 가짜 이름이었고, 대륙 최강 역시 레오가 정한 암호였다.

가짜 이름은 그렇다 쳐도, 암호는 너무 유치했다.

그래서 페르데스는 다른 걸로 바꾸자고 권유했지만, 레오가 거절했다.

유치해야 잊어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다나 뭐라나.

후자는 모르겠으나, 전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은 창구 뒤편에 있는 사물함을 뒤적이더니, 잠시 후 편지를 가져와 내밀었다.

“여기 말씀하신 편지입니다.”

“고마워.”

페르데스는 우체국을 나서자마자 편지를 뜯어 봤다.

편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레오의 글씨체가 아닌 우체국 직원이 그가 불러 준 내용을 대신 적은, 일명 ‘대필 서비스’였다.

이는 우체국 간 연락망인 마법 통신구를 이용한 서비스로, 수신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말하면 되었다.

그럼 우체국 직원이 그 내용을 편지에 적어, 상대방에게 전해 주는 것.

혹 다른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걸 막기 위해 대필 서비스를 신청할 땐 암호를 정해야 했다.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내용이 전부 까발려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아주 급한 전언이나, 누구나 알아도 되는 일이 아니면 이용하지 않았다.

페르데스 역시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레오가 조사한 내용을 빨리 받아 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이 봤을 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테고.

“역시 아무것도 찾지 못했군.”

부탁한 지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맥이 탁 빠졌다.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꾸깃꾸깃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태워 없앨 생각이었다.

“이왕 나온 김에 헌책방에 가 볼까.”

혹시 누군가 디아볼로스에 관한 책을 팔았을 수도 있으니까.

디아볼로스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비블로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비블로스 님은 어딜 가신 거지.’

그날 이후로 안 보이는 걸 보면 어디 멀리 간 것 같은데.

아니지. 비블로스 님은 텔레포트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이동 거리는 상관없겠네.

“비블로스 님.”

페르데스는 혹시 비블로스가 근처에 숨어 있나 싶어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없는 모양이네.

뭐. 어디 가서 무슨 일을 당할 분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안 그래도 다른 일로 머리가 아픈데, 비블로스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비블로스의 걱정을 털어 내던 페르데스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푹 눌러쓴 로브 사이로 언뜻 보이는 밝은 금발, 그리고 황금색 눈동자.

‘황태자?’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황태자가 분명했다.

이런 곳에서 황태자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페르데스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가 마음대로 황궁을 나온 것처럼 황태자 역시 자유롭게 황궁을 나올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아픈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보고 있는 데다가, 탈환전까지 겹쳐 황태자는 무척 바쁜 상태였다.

‘뭐, 전에 봤을 때는 한가로워 보였지만.’

그때는 연합국에서 침공하지 않았으니 여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가롭게 거리를 돌아다닐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런 황태자가 버젓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데다가, 호위 기사도 보이지 않으니 의아했다.

황태자는 화장실을 갈 때도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겁쟁이였으니까.

“수상쩍은 냄새가 난단 말이지.”

그것도 몹시.

페르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점점 멀어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로브를 꾹 눌러쓰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똑똑-

“페르데스 님.”

몇 번을 노크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티나 백작이 말했다.

“원수부 회의에 가셨다더니,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러게.”

원수부 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묻고 싶었는데, 아쉽네.

“그럼 우선 우체국부터 가지.”

“대필 서비스를 이용하실 거지요?”

“그래.”

레오폴드 기사단에 내 전언을 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백작은 기사단에 어떻게 전언을 보낼 거지?”

“저는 총괄 집사가 마법 통신 반지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 통해 전언을 보낼 겁니다.”

그렇지. 보통은 그러는 편이지.

나 역시 총괄 집사인 하네스와 마법 통신 반지를 하나씩 주고받았으나, 레오와 연락하느라 잠시 빌렸다.

얼른 반지를 돌려받아야 다시 공작저와 편하게 연락할 수 있을 텐데.

마음 같아선 마법 통신 반지를 한 쌍 더 사고 싶었으나, 그건 사고 싶다고 막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모르니 백작의 집사에게 내 전언을 그대로 적어 레오폴드 영지로 보내 달라고 해 줘.”

“그러겠습니다.” 

“그럼 대필 서비스는 5시까지밖에 안 하니, 서두르도록 하지.”

은행도 들러야 하니까, 서두르자.

마티나 백작의 마차를 타고 곧장 황궁 밖에 있는 우체국으로 향했다.

나는 수도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창밖을 내다봤다.

연합국의 침공 소식 때문인지 거리는 평소보다 뒤숭숭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고.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속이 쓰려, 커튼을 쳤다.

그리고 우체국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부지런히 달리던 마차가 우체국에 도착했다.

마티나 백작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그 뒤를 따라 내렸다.

“헉, 레오폴드 공작 각하!”

날 알아본 경비병이 크게 소리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됐다.

직원이 단걸음에 달려와, 공손히 말했다.

“귀빈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나와 마티나 백작은 직원을 따라 귀빈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른 직원이 차를 가져왔고, 그 차를 마시기도 전에 직급이 높아 보이는 직원이 들어왔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공작 각하. 백작님.”

나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찻잔을 들었다.

“영광일 것까지야.”

반면 마티나 백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 주었다.

직원은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공작 각하와 4황자 전하, 두 분을 모두 뵙다니.”

……뭐?

“이것 참, 제가 어젯밤에 무슨 좋은 꿈을 꿨길래…….”

타악-

“방금 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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