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25/262)

231화

자정이 넘어가는 늦은 시간.

“원수부에서 페르데스 님에게 황실 기사단의 통솔을 맡기고 싶다고 했다고요?”

갑자기 찾아온 페르데스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자,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실소하며 미간을 짚었다.

“총사령관이 없으니 누군가 대신 황실 기사단을 이끌어 줘야 하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황실 기사단은 대부분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페르데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 황실 기사단을 통솔하려면 그만한 작위나 신분이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라고 말하더군.”

“다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네요.”

황자는 절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회의실에도 못 들어오게 막았으면서, 자신들이 필요할 땐 부려 먹으려는 심보가 고약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나 역시 황족 중에서 누군가 나서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그 누군가는 황태자일 거고, 만약 황태자가 나가지 못한다면 5황자가 대신 나갈 거라고 생각했고.

그 위에 3황자가 있긴 하나, 그는 후작가의 영애와 결혼해서 후작위를 받았으니 예외였다.

페르데스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내 약혼자로서 황궁 밖에 살고 있는 데다가.

이미 황제의 명을 거역한 적이 있으니, 그에게 맡길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랬는데, 원수부 귀족들이 그를 찾아왔다고 하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황제가 허락한 일인가요?”

“아니. 일단 내 의견을 묻고, 그다음에 황제한테 보고할 거라고 하더라.”

역시 황제는 모르는 일이었구나.

“그럼 더 고민할 필요도 없네요. 페르데스 님이 한다고 해도 어차피 황제 측에서 안 된다고 할 테니까요.”

“만약 황제가 허락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아.”

“글쎄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인지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쪽이, 그대에게 도움이 되겠지?”

“그렇긴 하죠.”

확실히 페르데스가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정말로 그가 이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전쟁은 아이들의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피가 튀고, 사람이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끔찍한 전쟁터에 그를 내보낼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역시 그렇지?”

그러나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 건, 페르데스가 무척 기뻐하며 웃었기 때문이다.

저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요.”

뭐, 이렇게 대답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 * *

그럴 거라고 확신했는데.

“황제 폐하께서 4황자 전하께 황실 기사단의 통솔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다음날, 마티나 백작이 가져온 당황스러운 소식에 입이 떡 벌어졌다.

황제는 그 누구보다 의심이 많고, 남을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특히 한 번이라도 그를 배신한 전적이 있는 자라면, 그자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도 두 번 다시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제가 황실 기사단을 페르데스에게 맡겼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정말로 황제가 페르데스 님에게 황실 기사단을 맡긴다고 했나?”

마티나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 사살을 했다.

“듣자 하니 아침에 원수부 관리들이 황제 폐하의 서신을 들고, 4황자 전하를 찾아뵀다고 하던데. 모르셨습니까?”

그 말에 나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려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흠, 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이군요.”

“뭐,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그대를 찾아온 거고.”

“절 찾아온 지 무려 2시간이나 지났는데, 왜 말씀을 안 해 주신 거죠?”

“브런치를 먹는 중이었잖아. 충격받으면 입맛이 떨어질 테니, 일부러 말 안 했지.”

“…….”

다소 황당한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페르데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몸은 괜찮냐느니, 오늘 기분이 어떻냐느니, 오늘따라 유달리 내 상태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받아들이셨나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황명인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페르데스 님에게 황실 기사단을 맡긴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나도 어리둥절하더라.”

“그런 것치고 담담하신 것 같은데요.”

게다가 만약 황제가 허락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기도 했었지.

“페르데스 님은 황제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네요.”

“뭐, 그렇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누가 봐도 황제가 페르데스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닌데?

의아해서 묻자, 페르데스는 곁눈질로 마티나 백작을 쳐다봤다.

그가 있는 곳에선 말할 수 없으니, 나가 달라는 의미였다.

“저는 잠시 원수부에 다녀오겠습니다.”

마티나 백작이 눈치껏 나가자, 페르데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말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대를 습격한 놈들 말이야. 아나토메 친위대라고 했지?”

“네, 맞아요.”

“그대한테 마비 독을 쓴 놈도 아나토메 친위대야?”

“아니요. 그자는 거리의 소년이었지만, 아마 친위대의 사주를 받았을 거예요.”

아나토메 친위대에게 내 위치를 알려 주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놈들을 보낸 건 황제가 확실하고 말이야.”

“그렇죠.”

아나토메 친위대는 오로지 황제의 명령만 들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페르데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표정.

“왜 그러세요?”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요?”

“어째서 아나토메 친위대는 극독이 아닌 마비 독을 쓴 거지?”

……어라?

“내가 황제였다면, 그래서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면 마비 독이 아닌 극독을 쓰게 했을 거야. 단숨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독을 말이지.”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지적을 받고 나니 확실히 이상했다.

만약 황제가 아나토메 친위대의 실력을 믿어서 그런 거라면, 마비 독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두 번째 생에서 나와 알도르 경을 죽이고자 극독을 쓴 적이 있었다.

세 번째 생에서도 썼었지.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마비 독을 쓴 거지?

혹시 그 소년에게 사주한 사람이 아나토메 친위대가 아닌 건가?

“게다가 아나토메 친위대라면 제 1기사단과 실력을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하잖아. 암살 쪽에 특화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들이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네 명이 덤볐는데, 게다가 그대는 당시 마비 독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는데 제압하긴커녕 오히려 밀렸지.”

페르데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뭐, 통로가 좁아서 인원수로 밀어붙이기 힘들었다거나. 그대의 실력이 마비 독도 무시할 만큼 강해서. 혹은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에 나와 비블로스 님이 나타나서 그런 거라면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래도 조금 이상하지 않아?”

“네. 확실히 이상하네요.”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내게 치명상을 입힐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는데 전부 실패했었다.

단순히 운이 없어서, 혹은 내가 잘 막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전부 다 실패한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공격조차 마비된 왼팔로 막고 반격하면 내가 이기는 거였다.

이전 생에서 붙었던 그들의 검술 실력과 비교해서 생각해 봐도 전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이건 내 생각인데.”

페르데스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황제는 그대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럼 어째서 저한테 아나토메 친위대를 보낸 걸까요?”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대를 죽이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거야. 그러니 최대한 그대를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겠지.”

다른 목적이라. 

그게 뭘까?

혹시 날 납치한 뒤, 그 검을 가지고 오라고 협박할 생각이었던 건가?

황제가 노리는, 어쩌면 드래곤 하트가 붙어 있는 걸로 추정되는 특별한 검.

“한 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어떤 목적이었는지 추궁해 봤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네.”

“그러게요.”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전부 죽은 건 굉장히 아쉬웠다.

“혹시 모르니 그들의 시신이라도 수색해 볼까? 황제의 명령이 적힌 쪽지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아나토메 친위대는 황제에게 직접 명령을 받기 때문에, 쪽지 같은 건 없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그 녀석들이 복면을 쓰고 있는데도 아나토메 친위대인 걸 알아봤었지. 뭘 보고 알아본 거지?”

그야 이전 생에서 몇 번이나 그들과 싸워 봤으니까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한 가지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도르 경은 어떻게 어셔 안드리아가 아나토메 친위대 일원인 걸 알아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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