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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화 (224/262)

230화

“영지들을 한꺼번에 탈환하겠다고?”

“무려 다섯 곳이나 되는데…….”

내 말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렇겠지.

한두 곳도 아니고, 5곳을 한꺼번에 탈환하려면 그만큼 많은 전력이 필요한데, 그러면 불가피하게 동부령이나 남부령에서도 지원군을 보내야 했다.

아니면 황실 기사단이 움직이거나.

“5개의 영지를 한꺼번에 탈환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전력 낭비인 것 같습니다, 각하.”

“맞습니다. 괜히 전력을 분산했다가 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부령이나 동부령에서 군대를 보내 주면 절대 질 리가 없으니까요.”

“…….”

화살이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오자, 남부령과 동부령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지원군을 보내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둥, 괜히 시간을 질질 끌다가 연합국에서 전력을 보충하면 진압하기 더 어려워질 거라는 둥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물론 객관적인 입장에서 개소리라는 거지, 내 입장에선 아주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나는 연합국에서 비열한 방법까지 써 가며 5개의 영지를 한꺼번에 빼앗은 건, 제국에 대한 선전 포고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귀족들이 제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자존심이었다.

부를 쌓고, 권력을 탐하는 것도 자존심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부분을 건드렸으니, 귀족들은 크게 동요했다.

“이런 수모를 당했는데, 가만히 있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연합국에 당한 것 이상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야 연합국이 두 번 다시 제국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까.”

“이번 기회에 연합국을 와해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하지만 동부나 남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최소 열흘은 기다려야 하니……”

자. 그럼 다음 계획을 시작해 볼까.

말하려는데 가만히 앉아서 귀족들의 이야기를 듣던 황태자가 돌연 일어섰다.

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황태자에게 집중됐다.

“경들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본 바, 이번 탈환전에는 서부령과 북부령, 그리고 황실 기사단이 나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지금 뭐라고…….

“정말로 탈환전에 황실 기사단을 보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프라시스 후작이 깜짝 놀라며 되묻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고, 부황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폐하께서도 허락해 주실 겁니다. 이번 탈환전에는 제국의 자존심이 걸려 있으니까요.”

“하오나 황실 기사단이 움직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괜찮습니다. 황실 기사단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프라시스 후작을 비롯한 경들이 황실을 지켜 줄 테니까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전하!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 드리겠습니다!”

황태자와 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황태자가 내가 계획했던 걸 그대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물론 황족이 귀족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제국을 모욕한 건 황실을 모욕한 것과 다름없으니 저런 결정을 내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생각을 한 사람이 바로 황태자라는 거였다.

가장 자존심이 없고,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황태자가 어떻게 저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동안 황태자를 너무 무시했던 걸까?

“최정예 기사단인 황실 기사단이 나서 준다면, 이번 탈환전은 무조건 제국의 승리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기회에 연합국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줍시다.”

이로써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의견이 나왔으나, 최종 결정권자인 황제가 부재중인지라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특히 황실 기사단을 움직이려면 무조건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라, 황태자는 곧바로 황제를 만나러 갔다.

황태자가 돌아올 때까지 회의는 잠시 중단됐다.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대회의실을 나왔다.

“나왔네.”

그러자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계속 여기서 기다리신 거예요?”

“아니. 근처에 있다가 슬슬 끝날 것 같아서, 와 봤는데 타이밍을 잘 맞췄네.”

페르데스는 지나다니는 귀족들을 흘끗 보더니, 내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손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저쪽에 가서 이야기하자.”

나는 페르데스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넓은 회랑으로 나왔다.

페르데스가 멈춘 곳은 이전에 루센 공작과 이상한 대화를 나눴던 곳이었다.

알도르 경에게 충견이니 뭐니, 했던 그 장소.

페르데스가 그 일을 알 리가 없으니 단순한 우연이겠지만, 그래도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회의는 잘 끝났어?”

“네.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잘 풀리긴 했어요.”

“그런 것치고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그냥 조금 찝찝한 것뿐이에요.”

느닷없이 황태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으니까.

하지만 그것만 빼면 회의 자체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어떤 내용이 나왔어?”

“그게…….”

나는 페르데스에게 회의 내용을 전부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모든 내용을 들은 페르데스가 비로소 이해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그 부분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또 나중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회의가 전부 끝나고, 봄의 궁으로 돌아가면 전부 말씀드릴게요. 마티나 백작도 함께 말이죠.”

“그럼 다행이고.”

“그것보다 대현자님은요? 만나셨어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만났어. 그대가 한 말을 전부 전해 줬고.”

“그랬더니 대현자님이 뭐라고 했어요?”

“알겠다며, 혼자서 가겠다고 하던데.”

역시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가는 쪽을 선택했구나.

예상했던 결과인지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지만, 조금 걱정되긴 했다.

공작가의 혈족이 아닌데 정말로 지하실에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체르노서나 다른 사람들처럼 사라지면 어떡하지?

그리고 대현자가 말했던 드래곤의 하트.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검에 박혀 있는 커다란 퓨라 같은데.

그 검은 현재 마법 주머니에 고이 넣어서, 채권들과 함께 은행의 지하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무슨 생각해?”

낮고 부드러운 음색과 함께 이마를 만지는 서늘한 손길에 상념에서 깨어난 순간, 황금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

“……!”

그제야 페르데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깜짝 놀라며 그를 밀어냈다.

너무 세게 밀었는지, 페르데스는 뒤로 밀려나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괜찮냐고,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와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어우러져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더는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 때문에 넘어진 페르데스를 두고 다시 대회의실로 돌아왔다.

“각하?”

그러다 마침 대회의실에서 나온 마티나 백작과 정면에서 마주했다.

그의 뒤에는 북부령 귀족들도 있었다.

“마침 각하를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 괜찮으십니까?”

“어?”

“얼굴이 많이 붉으신데요.”

내 얼굴이 붉다고?

나는 창문을 거울 삼아 내 얼굴을 확인했다.

약간 흐리긴 하지만,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든 건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이전의 부상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그건 아니야.”

왼팔을 다친 것 말고, 큰 부상은 없었으니까.

그 왼팔도 뼈가 부러지거나 그런 건 아닌지라, 움직이는 데 지장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얼굴이 갑자기 붉어진 건, 아까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봤던 그의…….

다시금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든 외면하려고 했던 감정이 조금씩 몸집을 키우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 * *

황태자가 황제의 허락을 받아 다시 돌아온 건, 회의가 중단된 지 약 두 시간 뒤였다.

이로써 황실 기사단의 출전이 확정되었으나,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누가 황실 기사단을 이끌 것인가, 였다.

본디 원수부의 수장이자 제국의 총사령관이 이끄는 게 원칙이었다.

하나 전 총사령관이었던 아델의 부친이자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세상을 뜬 뒤로, 총사령관 자리는 계속 공석이었다.

“이래서 총사령관을 미리 뽑아야 한다고 계속 말씀드렸는데…….”

“마땅한 인재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누가 황실 기사단을 이끌죠?”

“글쎄요. 기사단장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황실 기사단 전체를 이끄는 건 무리니까 다른 분이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황자 전하 중에서 한 분이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은데…….”

황자 중에 과연 누가 나서는 게 좋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원수부 귀족들은 시침이 11을 가리키는 늦은 밤, 페르데스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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