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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화 (223/262)

229화

내가 황제와 똑같다고 생각한 건 황태자의 웃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닌, 특유의 분위기였다.

황제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 웃으며 풍기는 분위기와 쏙 빼닮았다.

물론 황태자는 황제의 아들이자 그 누구보다 황제를 따르는 충복이니, 분위기가 닮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 터라 찝찝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하룻밤 사이에 한 곳도 아니고 무려 다섯 곳이 점령을 당했습니다.”

내가 황태자를 유심히 관찰하는 와중에도 회의는 착실하게 진행됐다.

“그것도 다섯 영지 모두, 내부에 잠입한 연합국 군사들에게 당해, 허무하게 성문을 열어 줬다죠.”

“어허, 도대체 보안이 얼마나 허술하면, 연합군이 내부에 잠입한 것도 모른답니까!”

“듣자 하니 노예나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으로 위장해서 잠입했다고 합니다.”

“지, 지금 노예나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이라고 했습니까?”

귀족들은 깜짝 놀라며 술렁거렸다.

몇몇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들이 이토록 동요하는 이유는 그들 역시 노예들을 잔뜩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그림, 보석, 마법 물품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사들였다.

위조 금화 때문에 금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으니, 현물로 바꿔서 보관하려는 것이다.

그림이나 마법 용품 같은 건 사들이는 데 한계가 있고, 보관하는 것도 골치가 아팠으나, 노예는 아니었다.

애지중지하며 모실 필요도 없고, 팔릴 때까지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으니 잔뜩 사들인 귀족들이 제법 됐다.

그 노예들이 사실 연합군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노예뿐일까. 그들을 영지까지 운송한 노예 상단 사람들과 용병들도 전부 연합군이었다.

“도대체 검문을 어떻게 했길래, 그 많은 연합군이 제국에 쉽게 들어온 겁니까!”

황제파 귀족인 프라시스 후작이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쳤다. 

“아무리 위장을 했기로서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검문을 강화한다고 해도, 노예까지 신분 확인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맞습니다. 노예는 본디 신분이 불투명한 존재인지라, 신분 확인을 해도 소용이 없고요.”

귀족들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대꾸하자, 프라시스 후작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후작이 모멸감을 느낀 듯 파들파들 떨자, 황태자가 다독거렸다.

“다들 감정이 예민해진 상태라 그런 거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작.”

“……송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의 잘못인지 시시비비를 따지기보다, 연합국에 빼앗긴 영지들을 탈환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전하.”

프라시스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황태자의 말에 동감했다.

황태자가 서부령 귀족들의 수장인 몽돌드 백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탈환전에는 서부령 귀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합군에 빼앗긴 영지들은 전부 제국의 서부령이니, 황태자가 그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땅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송구하오나 저희 가문에는 기사단이 없어서…….”

“저희 역시 지원군을 보내기엔…….”

한데 그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건, 지원군을 보내면 그들의 영지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부령 귀족들의 대부분이 노예를 잔뜩 사들였으니까.

게다가 지원군을 보내려면 많은 돈이 드는데, 그 돈을 전부 그들이 부담해야 하니 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서부령 귀족들의 반응을 본 다른 귀족들이 말을 덧붙였다.

“기사단이 없다면 징병이라도 해서 보내면 되겠군요.”

“이번에 노예를 잔뜩 사들였다고 하던데, 그 노예들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그들이 못한다고 하면 그 부담이 자신들에게 넘어올 테니 어떻게든 막으려는 거였다.

하여간 다들 이기적이라니까.

그래서 다루기 쉬운 거지만.

“그 노예들이 연합군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들을 지원군으로 보냅니까?”

“맞습니다. 어디에 불순 인자가 섞여 있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니, 제 생각엔 이번 탈환전에는 황실 기사단이 직접 나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황실 기사단은 전부 신분이 확실한 자들로만 선별하니, 불안한 요소가 없지요.”

서부령 귀족들의 말에 맥밀 후작을 비롯한 황제파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황실 기사단을 움직였다가, 자칫 불순한 자들이 황궁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맞습니다. 영지 탈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황제 폐하를 지키는 일입니다.”

“이번 사건은 어찌 보면 서부령에서 검문을 소홀히 한 탓에 일어난 일이니, 그쪽에서 감당해야지요.”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자, 서부령 귀족들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모든 건 위조 금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중앙부의 무능력함 때문이지요!”

“어허, 무능력하다니! 말이 심하십니다!”

“먼저 말을 심하게 한 쪽이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잘 싸우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소리치는 모습이 투견장에서 봤던 개들과 비슷해서 웃겼다.

거기다 아무리 흥분했기로서니,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이리 언성을 높이다니.

그만큼 귀족들이 황태자를 우습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황태자는 줏대가 전혀 없는,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하는 개였으니까.

황제가 그를 황태자로 정한 이유도, 제 말을 잘 들어서 그런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지금 말 다 했습니까, 몽돌드 백작!”

“네! 솔직히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당신들이 손해 보고 싶지 않아 저희에게 떠넘기려는 거 맞지 않습니까!”

“아무리 뚫린 입이라지만 그런 막말을……!”

하여간 귀족들이 허수아비 황태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 탓에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이 상황에서도 황태자는 곤란하다는 듯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말려야겠네.

나는 유리잔을 바닥에 세게 집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널리 퍼지면서, 찬물을 끼얹은 듯 대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이목이 단번에 내게 집중됐다.

황태자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나는 황태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다들 황태자 전하께서 계신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흥분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대신 나서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떨떠름한 반응이라니.

그를 위해서 말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빴다.

한순간 그와 황제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게 우스워지기도 했고.

황제였다면, 귀족들이 언성을 높이는 순간 불같이 화를 냈을 테니까.

나는 하인이 깨진 유리잔 조각을 치울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빼앗긴 영지들이 전부 서부령 영지이긴 하나, 그 역시 제국 영토의 일부입니다. 모든 책임을 서부령 귀족들에게 부여하는 건 말도 안 되지요.”

내 말에 서부령 귀족들의 얼굴은 한순간 밝아졌고, 다른 귀족들의 표정은 구겨졌다.

“물론 모든 책임을 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프라시스 후작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단지 하루라도 빨리 영지를 탈환해야 하니, 가장 가까운 서부령에서 나서 주길 바란 거지요.”

로벤트 백작이 거들었다.

“맞습니다. 서부령 귀족들이 선발대로 나서고, 저희가 후발대로 지원을 하려고 했습니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동부령에서 서부령에 군대를 보내려면 최소 2주는 걸리니까요.”

“저희 남부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탈환된 영지가 전부 북서부인지라 최소 열흘은 필요합니다. 그것도 서부령과 가장 가까운 영지를 기준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좋아. 내가 원하는 말이 나왔네.

“그럼 저희 북부령에서 나설 수밖에 없네요.”

“……!”

내 말에 마티나 백작을 비롯한 북부령 귀족들이 깜짝 놀라며 날 바라봤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물었다.

“저와 함께하겠습니까?”

내가 물어본 건 같이 서부령에 지원군을 보낼 것인가의 여부가 아닌 이틀 전, 내가 한 제안에 함께할 것인지였다.

빙빙 돌려서 말한 탓에 숨은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눈치가 없는 놈과는 같은 배를 타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전부 알아들었는지, 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물론입니다.”

반면 마티나 백작은 결연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각하와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저도…….”

그러자 눈치만 보던 북부령 귀족들도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날 창고에 왔던 귀족들 전부.

한 명이라도 싫다고 하면 조금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나는 가슴 깊이 안도하면서도 뿌듯하게 웃었다.

“공작 각하께서 나서 주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뿌듯하게 웃은 건, 프라시스 후작이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북부령에서 나서니, 자기들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거겠지.

“그래서 말인데.”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너희들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데.

“연합국에 빼앗긴 영지들을 한꺼번에 탈환하려고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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