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쾅-
비블로스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소파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다이아몬드 형태로 변한 눈동자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진심입니다.”
“네놈……!”
“진정하세요, 비블로스 님.”
쾅-
페르데스가 만류하자, 비블로스는 다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감히 이 인간이 날 가지고 노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한단 말이냐!”
페르데스가 다시 나서려고 하자, 나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대신 대답했다.
“가지고 논 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 제안을 거절한 거지?”
“그야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듣지 못한 이야기?”
“네. 어째서 그곳에 가려는 건지 말해 주셔야죠.”
어쩌면 이 드래곤이 원하는 게, 황제가 원하는 것과 똑같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이유가 궁금했다.
무조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비블로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기울였던 상체를 꼿꼿이 폈다.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그야 저는 그곳의 주인이고, 대현자님은 손님이니까요. 목적을 밝히지 않는 손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
대현자는 내 대답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내게 개소리하지 말라는 등 역정을 내진 않았다.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그도 아는 거겠지.
“……참으로 당돌한 인간이군.”
“칭찬 감사합니다.”
“뻔뻔한 것도 똑같아.”
누구랑 똑같다는 거지?
대현자는 픽, 웃더니 페르데스에게 손을 까딱였다.
“넌 잠깐 나가 있거라.”
“뭘 하시려고요?”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고 나가 있어.”
“그런 거라면 같이 들어도…….”
“안 돼.”
대현자가 그의 말을 자르며, 문을 가리켰다.
“이건 평범한 인간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니 넌 나가 있도록.”
그 말은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
“아델은 어떻게 생각해?”
페르데스는 대현자를 설득하는 것에 실패하자,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붙잡아 주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현자님의 말대로 해요, 페르데스 님.”
대현자가 말하려는 게 내 가문과 관련된 일이라면, 외부인인 페르데스는 듣지 않는 게 맞았으니까.
“…….”
나까지 대현자의 편을 들자, 페르데스는 몹시 실망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죄송해요.”
나는 페르데스의 손을 꼭 붙잡아 주며 그를 위로했다.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해 줄 테니, 조금만 참아 주세요.”
“……나중에 꼭 말해 줘야 해.”
“물론이죠.”
그 나중이 10년 뒤일지, 20년 뒤일지는 모르는 거지.
“근처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쳐. 바로 달려올게.”
“그럴게요.”
“그 말은 내가 이 인간한테 무슨 짓을 한다는 건가?”
대현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블로스 님은 워낙 욱하시는 편이니, 그럴지도 모르죠.”
“너 진짜……. 후우, 아니다. 됐다. 얼른 나가 봐라.”
“아델에게 아무 짓도 하시면 안 됩니다.”
“안 해!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나가!”
페르데스가 쫓겨난 뒤, 방 안에는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게 해 줄 이야기가 있어서 페르데스를 내쫓은 것일 텐데, 어째서인지 대현자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째서 그곳에 가려고 하는지, 이유를 말해 주는 거 아니었나요?”
기다리다가 지친 내가 먼저 묻자, 그제야 대현자도 말문을 열었다.
“넌 네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죄송하지만,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만.”
“네 가문과 레드 드래곤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묻는 거다.”
그러니까 그걸 갑자기 왜 묻는 건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뱉었다간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억지로 삼켰다.
“레드 드래곤이 초대 레오폴드 공작에게 축복을 내린 것과 레오폴드 영지의 화산에 레드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는 등 기본적인 건 알고 있습니다.”
“푸핫.”
뭐야. 갑자기 왜 웃는 거지?
그것도 나를 비웃는 듯한, 상당히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빤히 쳐다보자, 대현자가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본적인 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웃겨서 그만.”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그래.”
돌연 웃음을 그친 대현자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날 바라봤다.
“넌 아무것도 몰라. 쥐뿔도 모른다고.”
“…….”
“물론 네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을 왜곡한 건 네 선조고, 넌 그 왜곡된 사실을 배운 것뿐이니까.”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말고,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죠.”
이 이상 질질 끄는 건 사절인지라, 단호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대현자는 실소하듯이 웃음을 흘리며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역시 시간 순서대로 하는 게 가장 알아듣기 좋겠지?”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네가 아는 레드 드래곤과 초대 레오폴드 공작의 설화는 전부 가짜다.”
“……!”
“그 남자가, 초대 레오폴드 공작이 제 허물을 덮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부정하며 말했다.
“그 모든 게 가짜라면, 제가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네가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뭐?
“다들 참으로 순진하지. 드래곤이 신도 아니고, 몇 대에 걸친 축복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연달아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말에 점점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대현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럼 정말로 내가…… 드래곤의 후손이라는 건가?
“말도 안 돼.”
“당연히 믿기 힘들겠지.”
대현자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부 사실이다. 넌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게 확실해. 아주 미약하지만, 너한테는 동족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그런가.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지만,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더 싫은 거다. 인간 주제에 동족의 기운을 풍기다니. 불쾌해. 아주 불쾌하다고.”
그러나 진심이 가득한 말과 표정을 보고 더는 의심하지 않는 건 물론 남아 있던 의심마저 지웠다.
정말로 내 몸속에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구나.
그렇다는 건…….
“레드 드래곤과 초대 레오폴드 공작은…… 연인 사이였군요.”
“그래. 아주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였었지.”
오래된 과거의 일이라서가 아닌, 이미 끝난 일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도 소문처럼 들은 이야기라서,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네 선조가 탐욕에 눈이 멀어 그 아이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심장을 도려냈다고 하더군.”
“……!”
심장을 도려냈다니.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이야기에 나는 기함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대현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뭘 그리 놀라? 인간이 드래곤의 하트를 노리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래? 뭐, 너는 마법사나 그쪽 계통이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대현자는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
“드래곤의 하트에는 방대한 마나가 깃들어 있어. 우리가 마법 최강 종족이라고 불리는 이유지.”
담담한 듯하면서도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호시탐탐 드래곤의 하트를 노렸어. 네 선조도 그 인간 중 하나고.”
“하지만……. 제 선조는 기사인걸요. 마나가 깃든 드래곤의 하트를 얻어 봤자 쓸 곳이 없을 텐데요.”
“왜 쓸 곳이 없어. 잘 쓰고 있던데.”
잘 쓰고 있다고?
“레오폴드 영지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퓨라들이 드래곤의 하트가 쓰이고 있다는 증거다.”
“……!”
그러니까, 그의 말을 해석하자면.
레오폴드 영지에 잠들어 있는 건 레드 드래곤이 아닌 그의 심장이며.
그 덕분에 영지의 광산에서 수많은 퓨라들이 생성된다, 이건가.
“믿을 수가…… 없네요.”
“그렇겠지. 하지만 전부 사실이다.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거든.”
“그 말은…… 제 영지에 다녀왔다는 건가요? 언제요?”
“언제긴. 네가 그 녀석한테 영지에 다녀와 달라고 부탁했던 그 날이지.”
아, 그때 페르데스와 같이 갔었구나.
“드래곤의 하트는 우리 종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드래곤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현자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한낱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건 용납 못 해. 죽은 그 아이도 바라지 않을 거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러니 내가 드래곤의 하트를 회수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