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황태자를 만난 것도 재수가 없는데, 상대가 반갑게 인사하니 더 짜증이 났다.
“…….”
페르데스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황태자를 쳐다봤다.
그건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
그럼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될 텐데, 할 말이 있는지 황태자는 페르데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반면 페르데스는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황태자가 슬쩍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겁니까?”
“그동안 어디 있었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정말 테시스 영지에 있었나?”
“상대방의 질문은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는 게 황실에서 가르치는 화법입니까? 참으로 대단한 화법이군요. 사람들이 내키지 않아도 황족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페르데스가 신랄하게 비꼬자, 황태자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누가 봐도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페르데스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혹시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형님?”
오히려 그가 싫어하는 호칭까지 쓰며 신경을 마구 긁었다.
이에 황태자는 당장이라도 페르데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다가,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뜬 황태자의 표정은 한결 안정되어 있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누군가 위조 금화를 대량으로 푸는 바람에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황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황자라는 놈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니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붙잡은 거다. 도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야. 형님께서 저한테 그리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페르데스는 또 형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신경을 다시 긁었지만, 황태자는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체르노서라면 바로 소리를 질렀을 텐데, 다르네.
하긴 황태자 정도 되는 녀석이 고작 이 정도에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건 네가 아닌 네 행보다. 반쪽이긴 하나 너도 황자인 만큼, 네가 이상한 짓을 하면 황실 전체가 욕을 먹을 테니까.”
“이것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요.”
“네 놈이 평소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녔다면, 하지 않았을 거다.”
이건 또 뭔 개소리인지.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제가 무슨 행실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는 겁니까?”
“많지. 당장만 해도 다른 사람들은 위조 금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데, 너는 놀러 다니지 않았느냐.”
“놀러 다닌 적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 있을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그리고 저는 황자라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데, 여기 있어 봤자 뭐 합니까?”
권력이 분산되는 걸 막기 위해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황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 혹시 저한테 정치에 참여할 권한을 주시려는 겁니까?”
황태자 자리를 달라는 은유적인 표현에 황태자의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주제를 넘지 마라, 페르데스.”
“농담입니다.”
페르데스는 황제의 개가 되는 자리 따위 줘도 안 가진다고 말하려다, 그건 일을 너무 크게 키우는 것 같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델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동안 어디 있었지?”
“테시스 영지에 있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그곳에서 널 본 사람이 없거늘.”
“그렇겠죠. 저도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개소리지?”
페르데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황태자의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보고했다.
“레오폴드 공작이 조금 전, 외출했다고 합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라.”
“네. 전하.”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아델을 만나러 온 건가.’
페르데스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할 말이 더 없으면 갈 길 가라고 하려 했는데, 황태자의 목적을 안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레오폴드 공작을 만나러 온 겁니까?”
황태자가 실소했다.
“내가 그 이유를 너한테 말해 줄 것 같으냐.”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그녀에게 물어보면 되니까요.”
“하하.”
이번에도 그의 신경을 긁으려고 했는데 황태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니, 오히려 제 신경이 긁힌 페르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는 겁니까?”
“고작 소꿉놀이 따위에 정을 준 네가 웃겨서 웃었다.”
“소꿉놀이?”
“그래. 너와 레오폴드 공작,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가짜로 맺어진 허울 좋은 관계가 아니더냐.”
역시 알고 있었나.
예전부터 아델에게 집적거린 것도 그렇고, 황태자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그렇다는 건 황제 역시 알고 있다는 의미.
‘그래서 계속 결혼을 밀어붙인 건가.’
나와 아델의 약혼이 깨질까봐 걱정돼서.
그런 것치고 나한테 직접적으로 강요한 건 없는데.
어서 아이를 가지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결혼 자체를 강요한 적은 없었다.
보통 아이보다는 결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데, 황제는 어째서 아이부터 원했던 걸까.
아이를 가지면 자연스레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원치 않아도 레오폴드 공작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네 마음은 이해한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페르데스가 쳐다보자, 황태자가 웃었다.
“네겐 감옥 같았던 황궁을 벗어나려면, 레오폴드 공작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겠지.”
“…….”
“그래도 기억해라.”
황태자가 눈을 부릅뜨며 페르데스의 양어깨를 잡았다.
“너는 황자다. 아무리 반쪽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 그 여자가 아닌 황실을 위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페르데스는 황태자의 말을 자르며, 그의 손을 우악스럽게 떼어 냈다.
“너 같은 건 황자가 아니라고, 황자의 탈을 쓴 비렁뱅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욕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뭣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했던 말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구나.”
“뭣도 모르는 어린 나이?”
페르데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 당시 저는 어렸지만, 형님은 이미 성인이셨을 텐데요.”
“이미 지나간 과거다.”
황태자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마음에 담아 두고 있어 봤자, 서로에게 도움 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만 잊고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자꾸나.”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서 최고의 개소리였다.
아니, 개소리라는 호칭이 부끄러울 정도로 쓰레기 같은 말에 페르데스는 인상을 팍 썼다.
황태자가 친한 척하는 것도 거슬렸지만, 더 거슬리는 건 그의 속내였다.
갑자기 친한 척하는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것도 아주 시커먼 꿍꿍이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페르데스는 그의 속내를 가늠하고자 황태자의 재수 없는 낯짝을 빤히 쳐다봤다.
황태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응시하던 와중.
“여기 계셨군요, 페르데스 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자, 페르데스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델은 밝게 웃으며 페르데스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레오폴드 공작.”
그것도 잠시, 황태자가 친한 척하며 말을 걸자 아델은 약간 놀라며 멈춰 섰다.
페르데스는 인상을 팍 쓰고, 그를 노려봤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공작을 만나러 왔습니다. 한데 방에 없길래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기쁘군요.”
“흐음, 그렇군요.”
아델이 조금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바쁘지 않다면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송구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황태자가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시간을 내주기 마련인데.
아델이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단칼에 거절하니, 황태자는 약간 당황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페르데스는 그 멍청한 표정을 대놓고 비웃었고.
“안…… 된다고요?”
“네. 지금은 다른 선약이 있어서, 황태자 전하께 시간을 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럼 여기에서 하시지요.”
그건 곤란한지,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남은 거리를 좁혀 온 아델이 페르데스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듯이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페르데스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는 아델을 내려다봤지만, 아델은 황태자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급한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미리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게 예의이기도 하고요.”
“…….”
아델이 예의를 운운하니, 황태자는 불만이 있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그제야 페르데스를 올려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는 괜히 움찔하며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뭔가 대단히 잘못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만 가요, 페르데스 님.”
“…….”
“페르데스 님?”
“응? 아, 미안. 그래. 가자.”
때문에 다소 바보 같이 반응했지만, 마주 잡은 손만큼은 절대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