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일을 숨기는 것만 해도 수상한데, 평소 질색하던 레오와 연락하겠다니.
더욱 수상쩍었다.
“레오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하시려는 건데요?”
“물어볼 게 있어서.”
“저와 관련된 건가요?”
“아니.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건지.
“내키지 않으면 빌려주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빌려드릴게요.”
페르데스는 날 위해 많은 걸 해 줬는데, 아무 증거도 없이 의심이 된다는 이유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혹시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빌려드려도 될까요? 그 반지는 황궁에 두고 왔거든요.”
페르데스가 약간 놀라며 되물었다.
“두고 왔다고?”
“네.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두고 왔는데……. 그게 놀라실 일인가요?”
“아니, 그냥. 항상 들고 다닐 줄 알았는데, 두고 왔다길래 조금 신기해서.”
신기할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나랑 주고받은 통신 반지도 두고 왔어?”
“아니요. 그건 들고 있어요.”
“아, 그래?”
어째서인지 페르데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오늘 안에 그 남자랑 연락했으면 좋겠는데. 언제 황궁으로 돌아갈 거야?”
“이제 돌아갈 거예요.”
마티나 백작에게 너무 신세를 지기도 했고, 내일을 위해서라도 슬슬 돌아가야 했다.
마티나 백작이 던진 의문에 관해서도 조사해야 하고.
“페르데스 님도 함께 가실 건가요?”
“글쎄. 나는 그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페르데스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데다가, 테시스 영지에서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람까지 등장했으니까.
“그럼 같이 돌아가자.”
페르데스는 그리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단순히 같이 돌아가자는 의미로 내민 손인데, 이상하게도 저 손을 잡는 게 부담스러웠다.
잡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담 가지지 말자.
이제 와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나는 뒤숭숭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그의 손을 잡았다.
* * *
아델은 약속한 대로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페르데스에게 마법 통신 반지를 빌려주었다.
곧장 침실로 돌아온 페르데스는 방문을 꼭 걸어 잠근 뒤, 문과 창문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아 레오에게 통신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레오가 다급하게 사과했다.
-주변을 샅샅이 다 뒤져 봤는데, 아직 황자 전하를 찾지 못했습니다. 길드원까지 풀어서 열심히 찾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신다면…….
“그럴 필요 없다.”
-……황자 전하?
“그래. 나다.”
페르데스가 재차 그인 걸 확인시켜 주자, 침묵이 흘렀다.
퓨라가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는데도 통신이 끊긴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기절한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소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놀란 건 맞습니다. 이 반지로 전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건 그렇지.
페르데스는 레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떻게 벌써 수도에 가신 겁니까? 전하께서 가장 빠른 루트로 갔다고 해도, 지금 수도에 계신 건 말이 되지 않는데…….
“자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빠른 루트를 알고 있거든.”
-그게 뭔데요?
“내가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른 사람들에겐 알려 줄 수 없는 방법이다.
이에 레오는 너무하다는 둥, 좋은 방법이면 같이 좀 알자는 둥 투덜거렸다.
“투정은 거기까지.”
쓸데없이 대화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아, 페르데스는 단호하게 잘랐다.
“자네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했어.”
-그 상단에 관한 거라면 아무것도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상단에 관한 게 아니야.”
페르데스는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섰다.
“알도르 샹크티스. 그 남자에 관한 거다.”
페르데스는 오늘 아침, 수도의 우체국을 방문해서 메이가 아델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편지는 없었다.
같은 날짜에 레오폴드 영지에서 보낸 다른 것들은 있는데 그 편지만 없다는 사실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메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누군가 중간에서 편지를 가로챘다는 것.
‘아마 후자겠지.’
메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메이의 편지를 가로챈 걸까.
페르데스는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용의자를 두 명으로 줄일 수 있었다.
바로 알도르와 에런이었다.
둘 중에서 누가 더 의심스럽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알도르였기에, 페르데스는 그를 먼저 조사하기로 했다.
“지금 그 남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아니요. 모릅니다.
“어디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없고?”
-네. 연락 안 한 지 조금 오래돼서, 그 녀석이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레오는 알도르의 친구인데다가 제법 유능한 정보상이니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군.
“그래, 알았다.”
다른 곳에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잠깐만요!
더는 그에게 볼일이 없으니 통신을 끊으려는데, 레오가 다급하게 불렀다.
-갑자기 알도르의 행방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혹시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갑자기 사라졌다.”
알도르가 사라진 건 조금만 알아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니, 페르데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다 말하지는 않았다.
-사라졌다니……. 공작 각하도 그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십니까?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녀석이 공작 각하께도 말하지 않고 사라졌을 리가 없는데…….
몹시 당황했는지, 레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제가 그 녀석을 찾아보겠습니다!
“됐어.”
알도르도 못 믿는 와중에 그 친구인 레오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응을 봤을 땐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어차피 그 녀석을 찾으실 거잖아요.
“그래도 자네한테는 맡기지 않을 거야.”
-제가 알도르의 친구라서요?
“잘 아는군.”
-아니요. 그렇다면 더 맡기셔야죠.
레오가 이상한 논리를 펼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시다시피 저는 알도르의 친구입니다. 그 녀석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갈 만한 곳이 어떤 곳이 있는지 등등 그 녀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죠.
“…….”
-게다가 실력 있는 정보상이니, 저만큼 그 녀석을 잘 찾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제 입으로 실력 있는 정보상이라고 말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는 걸까.
그만큼 자신이 있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저한테 맡겨 주세요. 제가 반드시 알도르를 찾겠습니다.
“글쎄. 내가 수도에 있는 것도 알아내지 못한 녀석에게 맡겨도 될지 의문이네.”
-그,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였어요! 설마 이렇게 빨리 수도에 도착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레오가 퍽이나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자, 그제야 기분이 풀린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좋아. 자네한테 한 번 맡겨 보지.”
물론 레오에게만 맡길 생각은 없었다.
“대신 이 일은 아델에겐 비밀로 해.”
-흐음?
기분 나쁜 콧소리.
-보아하니 공작 각하께선 알도르가 사라진 것조차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제 약점을 잡았다는 듯한 의기양양한 말투에 페르데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이걸로 날 협박할 생각인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제가 조심해야 하나 싶어 여쭤본 겁니다.
“그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페르데스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너와 나는 한배를 탔으니까.”
-네? 한배라니요! 저는 그저 전하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난 괜찮다고 했는데, 자네가 하겠다고 간곡히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잖아.”
-…….
할 말을 잃었는지, 레오가 입을 다물었다.
반면 레오를 이겼다는 사실에 페르데스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하니 더욱 즐거웠다.
-어째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것 같아 찝찝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하기로 했으니 해야지.
레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알도르의 실종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없으신가요? 가령 언제 사라졌다던가. 어쩌다 사라졌다던가.
“그건 직접 알아봐. 유능한 정보상인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한배를 탔다면서, 이 정도도 못 도와주시는 겁니까?
“응.”
-우우, 진짜 치사하십니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레오가 야유를 퍼부었지만, 페르데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럼 입단속 잘 하고,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네.”
통신은 거기서 끝이었다.
페르데스는 퓨라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실을 나왔다.
곧장 아델에게 빌린 반지를 돌려주러 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와 멈춰 섰다.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르데스와 비슷한 황금색 눈동자.
그보다 더 진한 황금색 머리칼.
“오랜만이구나.”
바로 황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