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꿈을 꾸지 않을 정도로 푹 자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상쾌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욕실로 들어갔다.
개운하게 씻고 나오자, 침구를 정리하고 있던 하녀가 물었다.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라고?
“지금 몇 시지?”
“오전 11시 45분입니다.”
하녀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지만, 믿기지 않아 직접 시계를 확인했다.
“진짜네.”
하녀가 말한 대로였다.
페르데스를 기다리느라 늦게 자긴 했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늦잠을 잤을 줄이야.
아무리 늦게 자도 9시 전에는 칼같이 일어나는 편이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 그만큼 피곤했다는 거겠지만.
“마티나 백작은 지금 어디에 있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그럼 백작에게 같이 점심을 먹겠냐고 물어봐 주렴.”
하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아, 페르데스 님에게도 같이 먹자고 말해야지.
사용인을 불러 명령하려다, 내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의 침실로 향했다.
똑똑-
“페르데스 님.”
똑똑똑-
“페르데스 님?”
뭐지. 안에 없는 건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확인해 보려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사용인이 그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황자 전하께선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없으셨니? 내게 전할 말이 있다던가.”
“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만, 각하께서 원하신다면 알아보겠습니다.”
“음, 아니야.”
페르데스가 내게 할 말이 있었다면, 쪽지 같은 걸로 남겼겠지.
그래서 더 의아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 페르데스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내게 말도 없이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즉, 이번 외출에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의미.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
개인적인 사정이라면 물어보지 않는 게 맞지만, 왠지 나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페르데스 님이 돌아오면 내게 알려 주렴.”
하인에게 말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 마티나 백작에게 보냈던 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님께서 그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잘됐구나.”
“바로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각하.”
나는 하녀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먼저 식당에 와 있던 백작이 살갑게 인사했다.
“좋은 점심입니다, 공작 각하.”
“그래. 좋은 점심이네.”
나는 집사가 직접 빼 준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곁자리에 앉은 마티나 백작이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혹 아프신 곳이 있다면, 참지 마시고 즉시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럴게.”
사용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오면서, 대화가 잠시 끊겼다.
“모두 나가거라.”
마티나 백작은 식사 시중을 드는 사용인까지 전부 내보낸 뒤 내게 말했다.
“오늘 아침, 렌소르 자작이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젯밤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저와 긴히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이죠.”
렌소르 자작은 소심하고, 자기주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제 의지로 마티나 백작에게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고.
아마 다른 북부령 귀족들이 대신 편지를 보내 달라고 닦달한 거겠지.
“그래서 뭐라고 답을 보냈지?”
“각하께 어쩌면 좋을지 여쭤보고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직 보내지 않았습니다.”
“잘했어.”
내게 물어본다고 해도 내줄 답은 그의 생각과 동일했지만, 그래도 내게 먼저 의견을 구하려고 했다는 게 중요했다.
“렌소르 자작을 만나도록 해. 아마 그 자리에 다른 북부령 귀족들도 있을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역시 그렇겠지요.”
마티나 백작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자르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 모인 귀족들은 제국의 충성심보다 영지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자들이니까. 지금쯤 어쩌면 좋을지 저울질만 하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만나면 백작이 나와 뜻을 같이한다는 걸 알려도 좋을 것 같아. 그러면 그들도 흔들리는 마음을 빠르게 다잡을 수 있을 테니까.”
“일단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 보고, 기회를 봐서 말하겠습니다.”
“부탁할게.”
“그래서 말인데……. 각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물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나 백작이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래 제국의 경제를 뒤흔드는 위조 금화 사건 말입니다. 혹시……?”
“내가 한 짓이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맞아.”
한배를 탔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마티나 백작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졌다.
“저, 정말로 각하께서…….”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짐작만 했던 사실이 맞다고 하니 조금 놀라워서…….”
마티나 백작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가 내게 다시 물었다.
“혹시 황제 폐하께 위조 금화를 해결해 주는 대신 레오폴드 영지를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런 시시한 방법으로는 독립할 수가 없을뿐더러, 아무리 나라도 위조 금화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어.”
가문의 전 재산을 전부 다 쏟아붓는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독립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같은 배를 탔어도, 말해 줄 수 있는 선이 있는 법.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마티나 백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엄청난 걸 계획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엄청나다 못해 아주 깜짝 놀랄 만한 걸 계획하고 있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아직도 물어볼 게 남아 있는 건가.
나는 물 잔을 집어 들며 물었다.
“뭐지?”
“4황자 전하와 언제 파혼하실 생각이십니까?”
뒤이어 나온 질문에 나는 물을 마시려다 멈칫했다.
물을 마시기 전에 들어서 다행이지, 만약 먹고 있었다면 그대로 뿜었을 것이다.
나는 물잔을 내려놓고, 마티나 백작을 쳐다봤다.
그 역시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공작 각하께서 어떤 방법으로 독립하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독립하려면 황제 폐하, 그리고 황실과 척을 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런 상황에서 4황자 전하와 계속 약혼한 상태로 있는 건, 공작 각하의 발목을 잡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당연히 황자 전하와 파혼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본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언제 파혼할 거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편이 좋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자꾸만 마음이 이를 부정하는 바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마티나 백작이 불안하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4황자 전하와 결혼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야.”
파혼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페르데스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할 수도 없었고.
“페르데스 님과 언제 파혼하면 좋을지, 아직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잠시 고민했던 것뿐이네. 페르데스 님은 여러모로 날 많이 도와주셨거든.”
“그렇게 보이긴 했습니다.”
마티나 백작도 그 부분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도 그분이 황자 전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황실에서 완전히 독립하려면 연결 고리는 확실하게 끊어 내야 합니다, 각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페르데스를 생각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원래 식욕도 별로 없는 터라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일어났다.
“더 할 말이 없다면 먼저 일어나 보겠네.”
마티나 백작도 덩달아 일어섰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신 건 아닌지…….”
“아니야.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말게.”
나는 식당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백작에게 당부했다.
“렌소르 자작에게 답장을 보내고, 만날 약속이 정해지면 내게 곧바로 알려 줘. 그곳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알려 주고.”
마티나 백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곧바로 식당을 나와 중앙 홀로 들어서는데, 아까 페르데스의 침실 앞에서 만났던 하인이 다가왔다.
“각하. 4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지금 페르데스 님은 어디 계시지?”
“여기 있어.”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이제 막 돌아온 건지, 외투도 벗지 않은 그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페르데스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진 그에게선 약간 특이한 냄새가 났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그 볼일이 저와 관련 있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페르데스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어.”
역시.
“하지만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어. 좀 더 확실해지면, 그때 말해 줄게.”
그럼 뭔지 말해 달라고 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서 말인데. 레오, 그 남자와 연락하게 마법 통신 반지 좀 빌려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