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아델은 분명 알도르를 레오폴드 영지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기사는 알도르가 아델과 함께 수도에 있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델이 착각했을 리는 없어.’
그렇다고 기사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알도르가 아델의 명령을 어기고, 레오폴드 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다른 하나는 알도르가 레오폴드 영지로 가던 와중, 사고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영지에 오지 못했다.
‘아마 후자겠지.’
알도르는 절대 아델의 명령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혹시 루센 공작이 데리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알도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있는 건지도.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루센 공작을 만나야 한다는 거였다.
“어쩔 수 없지.”
아델과 루센 공작이 엮이는 게 싫었지만, 그렇다고 알도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평소 그를 싫어하긴 해도, 잘못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알도르가 잘못된다면 아델이 무척 슬퍼할 테니, 페르데스는 그가 무사하길 바랐다.
‘일단 아델에게 돌아가야겠어.’
곧장 기사단 숙소를 나서는데,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페르데스 님!”
바로 잭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오랜만에 보는 잭과 인사는 해야겠지.
“안녕, 잭.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자, 잠시만요!”
말 그대로 인사만 하고 가려는데, 잭이 다급하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
바빠 죽겠는데, 왜 귀찮게 하는 건지.
“공작 각하께 가시는 거라면, 제 말 좀 전해 주세요!”
짜증을 내려던 페르데스는 뒤이은 부탁에 멈칫했다.
“무슨 말?”
“부단장님이 마티나 역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거랑, 수도에서 마티나 역까지 가는 기차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쩍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거요.”
“……뭐?”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작스러운 말에 반쯤 넋이 나간 페르데스와 달리 잭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저한테 말하라고 하신 걸 보면, 제가 정보들을 취합해서 알려 주길 바라신 것 같은데, 페르데스 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글을 쓸 줄 모르잖아요.”
“…….”
“그런데 수도에 계신 공작 각하께 이 소식들을 어떻게 알려 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마침 페르데스 님이…….”
“잠깐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알도르 샹크스가 마티나 역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거지? 기차에선 수상쩍은 사람과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눈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들었어요.”
“누구한테?”
“그야 공작 각하의 명령을 받고 부단장님을 감시하던 수도 공작저의 사용인한테 들었죠.”
아델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니.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슬펐다.
알도르를 감시해야 할 만큼, 아델이 주변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
페르데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곧바로 아델에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잭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잭. 그 남자를 감시했던 사용인들을 만나게 해 줘.”
* * *
아델의 명령을 받은 사용인들은 총 5명으로, 페르데스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잭도 몰랐던 몇 가지 사실들을 더 알아냈다.
첫 번째. 아델은 알도르뿐만 아니라 에런과 수도 공작저의 사용인들을 전부 레오폴드 영지로 보냈다.
두 번째. 에런은 마티나 역에 도착하기 직전. 알도르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세 번째. 에런이 먼저 사라졌고, 알도르는 그를 찾으러 간다고 했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네 번째. 반면 에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지만, 대뜸 휴가를 가야겠다며 짐을 챙겨 나갔다.
다섯 번째. 사용인들은 이 사실을 메이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메이, 넌 사흘 전에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단 말이지.”
자다가 잭에게 끌려 나온 메이가 비몽사몽 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용인들은 이야기를 끝내고, 제 방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페르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사흘이면 아델에게 편지가 도착하기 충분한 시간이긴 하지만, 가끔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아델이 아직 편지를 받지 못한 게 이상할 건 없었지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내일 날이 밝으면 우체국을 확인해 봐야겠어.’
그 외에 알도르나 에런이 싸운 것, 알도르가 에런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 등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알도르가 기차에서 이야기를 나눴다는 수상쩍은 사람이 누군지도 궁금했고.
처음 알도르가 없어진 걸 알았을 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씩 바뀌었다.
알도르는 제 의지로 아델의 명령을 어기고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뭐 하냐?”
문득 비블로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페르데스는 뒤를 돌아봤다.
비블로스가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두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안 오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와 봤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여전히 남아 있던 메이와 잭이 눈동자를 데구룩, 굴리며 비블로스와 페르데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페르데스는 제국의 황자로, 그보다 높은 신분은 황제와 그의 비, 그리고 황태자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비블로스에게 존댓말을 쓰니, 의아한 것이다.
“페르데스 님, 저분은 누구신지……?”
잭이 슬쩍 물어봤지만, 페르데스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네.”
“네. 조금 심각한 문제가 터졌습니다.”
“지금 여기서 해결해야 해?”
“아닙니다.”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뿐더러, 슬슬 아델에게 돌아가야 했다.
“이만 돌아가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비블로스가 먼저 돌아서고, 페르데스는 그 뒤를 따라가려다 잭과 메이에게 당부했다.
“혹시 알도르나 에런이 돌아온다면, 어디 가지 못하게 꼭 붙잡아 두고 있어.”
* * *
페르데스는 자고 있으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델은 초조하게 방을 돌아다니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높이 떠 있던 달이 기울고 푸르스름한 여명이 창밖을 가득 채운, 늦으면서도 이른 어느 시간.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이가 들어오자 아델은 반색하며 다가갔다.
“페르데스 님!”
“뭐야.”
페르데스는 들어오다 말고, 놀라며 아델을 쳐다봤다.
“안 자고 있었어?”
“네. 잠이 안 와서요.”
“그게 아니라 날 기다리느라 못 잔 거겠지.”
아델이 말없이 웃자, 페르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날 기다려 주는 건 좋지만, 몸도 안 좋은데 그러는 건 싫어.”
“괜찮아요. 마비도 다 풀렸고요.”
아델은 정말로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왼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도 못 미더운지 페르데스가 혀를 차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하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건 설마……?
불안해진 아델이 그의 팔을 역으로 잡으며 물었다.
“알도르 경이……저택에 없었나요?”
“……아니.”
처음에는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지만, 사용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루센 공작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뒤, 사실대로 말해야지.
“있는지 확인하려다, 자는 걸 깨워서 한바탕 싸웠어. 하여간 성질이 더러운 놈이라니까.”
“자는데 깨웠으니, 그럴 만하죠.”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껌뻑 넘어간 아델이 안심하며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양심이 콕콕, 찔려, 페르데스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나저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재미있는 이야기요?”
“응. 그 남자랑 에런 경이 싸웠다고 하던데.”
아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뭘 그래 놀래? 둘 다 사람인데 싸울 수도 있지.”
“그렇긴 한데……알도르 경이 다른 기사들과 싸우는 건 처음 봐서요.”
“처음 본다고? 정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도르 경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인지라, 다른 기사들과 충돌이 적거든요.”
게다가 부단장이니 기사들도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알도르가 에런과 싸웠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글쎄. 자세히는 물어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물어볼게.”
“아니에요. 좋은 일도 아닌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페르데스가 아델의 어깨를 잡고, 침대 쪽으로 돌렸다.
“그럼 궁금한 부분이 풀렸으니, 이만 침대로 가서 자도록 해.”
“졸리지 않아요.”
“그래도 자. 그대가 자야 나도 잘 수 있을 테니까.”
페르데스가 저리 말하니, 아델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잘자.”
“페르데스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페르데스는 손수 촛불을 끈 뒤, 침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아델은 새벽녘의 여명으로 가득 찬 허공을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는지, 눈을 감자마자 수마가 몰려왔다.
하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피곤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알도르가 무사한 것도 확인했겠다, 아델은 기꺼이 수마를 받아들였다.
곧 침실 안에는 평온한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