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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화 (215/262)

221화

아델과 헤어지고, 백작저를 나온 페르데스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갔다.

세상을 밝게 비추던 보름달이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춘 늦은 밤.

페르데스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쓱 둘러본 뒤, 어둠이 자욱한 골목길 안쪽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비블로스 님.”

순간 싸늘한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름 뒤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보름달이 골목길 안쪽에 서 있는 인영의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처럼 환한 달빛을 쏟아 냈다.

“신기하네.”

그 인영은 바로 비블로스였다.

“분명 기척을 지웠는데, 내가 근처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알아챈 게 아니라 그냥 짚어 본 겁니다. 호기심 많은 비블로스 님이라면 분명 떠나지 않고, 저희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

비블로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하며, 팔짱을 꼈다.

“요컨대 넌 그냥 한 번 찔러본 건데, 나 혼자 찔려서 나왔다는 거군.”

페르데스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뒤, 물었다.

“계속 제 근처에 계셨으면, 저와 그녀가 나누는 대화를 다 들으셨겠군요.”

“그래. 들었지.”

비블로스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아주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무례한 소리까지 전부 다 들었다.”

성큼, 페르데스 쪽으로 다가온 비블로스가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하는 짓이 귀여워 오냐오냐해줬더니, 네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고 하는구나.”

어찌나 세게 움켜쥐는지,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 무척 고통스러웠으나, 페르데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느새 날카로워진 안광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고통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진 어쩔 수가 없었다.

목소리 대신 신음이 튀어나오려고 하자, 페르데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절 죽일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그걸 네 놈이 어떻게 장담하지?”

“만약 절 죽일 생각이라면, 이렇게 물어보는 게 아니라 바로 제 목을 잘랐겠죠.”

“…….”

“아닙니까?”

“빌어먹을.”

비블로스는 작게 욕설을 읊조리며, 내팽개치다시피 페르데스의 어깨를 놓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넌 참 재수 없고 짜증 나는 놈이야.”

“감사합니다.”

“나 참. 도대체 뭘 먹고 저리 뻔뻔한 건지…….”

비블로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페르데스는 약간 구겨진 옷깃을 툭툭 펴낸 뒤,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뻔뻔한 요구에 비블로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난 교통수단이 아니라고.”

“저도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 당연하다는 듯이 또 내 등에 타려는 거지?”

“그 방법 말고는 레오폴드 영지까지 단숨에 갈 방법이 없으니까요.”

“왜 없어. 텔레포트가 있는데.”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그의 말에 숨은 뜻을 이해한 페르데스가 약간 놀라며 물었다.

“레오폴드 영지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반면 비블로스는 그가 말해 놓고 곤란하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가 본 적이 있으시군요.”

“……맞아.”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데다가, 이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눈치 빠른 페르데스를 속일 수는 없으니 비블로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주 오래전에 몇 번 가 봤었지.”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씩이나요.”

“…….”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비블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수도에는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레오폴드 영지에는 몇 번씩이나 가 봤다는 건, 그곳에 특별한 볼일이 있다는 거겠죠.”

페르데스가 턱을 괴고, 추측한 것들을 말했다.

“제 생각에 그 특별한 볼일이 레오폴드 영지에 잠들어 있는 레드 드래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맞습니까?”

“……뻔뻔한 데다가 쓸데없이 눈치까지 빠르다니. 세상 살기 참 편하겠군.”

역시 그런 거였군.

페르데스는 비블로스와 그 레드 드래곤의 관계 등,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안 그래도 비블로스 님의 등에 또 타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텔레포트를 쓸 수 있다니. 좋은 소식이군요.”

비블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마음에 걸리는 놈치고 태도가 너무 뻔뻔하던데.”

“아시다시피 제가 좀 뻔뻔한 성격이라서요.”

“허허,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 말은 제가 밉다는 겁니까?”

“그래. 아주 미워 죽겠다.”

비블로스는 질색하며 말했지만, 페르데스는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대?”

“비블로스 님과 나름 친해진 게 좋아서 웃은 겁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언제 친해졌는데?”

“그럼 아닌 거로 하겠습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비블로스는 이런 놈을 왜 도와줘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바닥에 착실히 마법진을 그렸다.

‘이게 바로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이군.’

텔레포트 스크롤에 쓰이는 마법진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페르데스는 생전 처음 보는 마법진을 눈과 머리에 새겨 넣었다.

“단숨에 먼 거리를 이동하다 보니 어지러울 수도 있다는 거, 명심해.”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 괜히 쓰러져서 날 귀찮게 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 거다.”

그게 바로 걱정하는 건데.

그리 말하면 비블로스가 또 노발대발할 테니, 페르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지.”

페르데스가 마법진 위로 올라오자, 비블로스는 마법진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눈이 멀 정도로 밝고 푸른 빛이 그들을 감쌌다.

잠시 후, 빛이 완전히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비블로스가 어지러울 수 있다고 미리 경고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페르데스는 눈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자리 돌기를 수백 번은 한 것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며칠 전에 먹은 것까지 전부 올라올 것 같은 아찔한 느낌에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냐?”

그러자 비블로스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물었다.

페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표정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었다.

어지럽던 시야가 차츰 안정되면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을음이 묻은 나무와 땅. 

지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

“여긴 화산입니까?”

“그래. 원래는 평범한 산이었지만, 이곳에 그 녀석이 잠들면서 화산이 되었지.”

비블로스가 말하는 그 녀석은 레드 드래곤일 터.

비블로스가 친근하게 부르는 걸 봐서 상당히 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델에게 관심을 보인 건가?’

그녀가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단순히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페르데스는 추억을 회상하는 듯 주변을 살펴보는 비블로스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비블로스가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뭐야. 할 말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긴.”

비블로스는 다시 주변을 쓱, 훑어보곤 물었다.

“넌 곧바로 레오폴드 공작저로 갈 거지?”

“네.”

“그럼 난 여기 있을 테니까, 볼일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와.”

비블로스가 이곳에 남으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페르데스는 깊이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블로스가 말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페르데스 역시 그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알도르가 레오폴드 공작저에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니,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페르데스는 재빨리 산에서 내려와 공작저로 향했다.

“화, 황자 전하?”

공작저의 후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는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전하께서 어째서 여기…… 아니, 왜 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건지……?”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일단 문부터 열어.”

“네, 네!”

공작저 안으로 들어온 페르데스는 곧바로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있을 거야.

아니, 꼭 있어야만 해.

그래야 아델이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위험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부디 알도르가 숙소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없네.”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게 정리된 침상을 손으로 훑었다.

싸늘했다. 온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도르가 침대를 떠난 지 꽤 오래됐다는 의미였다.

아니면 아직 돌아오지 않았거나.

……어쩌면 이미 어딘가로 가 버린 건지도.

“찾아봐야겠네.”

넓은 공작저를 마구 돌아다니며 찾는 것보다는 그를 본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는 게 확실하고 빨랐다.

“거기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페르데스는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기사에게 불러 세웠다.

“페르데스 님?”

그 기사도 경비를 섰던 기사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멀리 가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방금. 그것보다 알도르 경이 안 보이는데,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님이라면 단장님과 함께 수도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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