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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214/262)

220화

그를 얼마나 믿냐니.

갑작스러우면서도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보통 때라면 그 역시 많이 믿고 있다고 대답했겠지만, 아까 그런 말을 한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

“그래. 그런 거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뭔가 알아챈 듯 페르데스가 쓰게 웃으며 쪽지를 흔들었다.

“그래서, 루센 공작이 왜 이런 내용을 썼는지 직접 물어보러 가는 건가?”

“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상관없어요. 루센 공작도 그러니 지금 저한테 이런 쪽지를 보낸 거겠죠.”

“흐음.”

페르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쪽지를 확인했다.

“굳이 루센 공작을 찾아갈 필요가 있나? 알도르 경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인데.”

“그건 불가능해요.”

“왜? 그 남자, 지금 공작저에 있는 거 아니야?”

페르데스가 말하는 공작저는 수도의 공작저였다.

“아니에요. 알도르 경은 현재 레오폴드 영지의 공작저에 있어요.”

“응?”

페르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호위에 목숨을 거는 그 남자가 널 두고 영지로 돌아갔다고?”

“네. 제가 그러라고 했거든요.”

“아아, 알 만하군.”

페르데스는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늦은 시간에 레오폴드 영지에 없기도 하고, 알도르 경이 제 명령을 어기고 영지를 나갔을 리도 없으니, 루센 공작을 만나서 물어보려는 거예요.”

만약 알도르 경이 영지에서 사라졌다면, 그에게 메이나 잭이 내게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수도의 공작저 사용인 중 몇몇에게 알도르 경을 감시해 달라고, 만약 그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메이나 잭에게 말해 달라고 일러뒀으니까.

그들이 보낸 편지가 내게 도착하려면 최소 사흘은 걸리니, 그걸 토대로 계산해 봤을 때 만약 알도르 경이 자리를 비웠다면 그 기간은 사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난 왜 이런 걸 계산하고 있는 거지?

알도르 경이 절대 내 명령을 어겼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더 늦기 전에 루센 공작을 만나러 가야 하니, 이만 비켜 주세요.”

더불어 쪽지를 돌려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쪽지를 돌려주긴커녕, 오히려 손안으로 말아 쥐었다.

“내가 확인해 볼게.”

그러더니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알도르 경이 레오폴드 영지의 공작저에 있는지, 없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 볼게.”

“그는 반드시 공작저에 있을 테니, 굳이 확인하실 필요 없어요.”

“거짓말.”

페르데스의 한쪽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이런 쪽지를 보고 동요하지도, 이 늦은 밤중에 루센 공작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겠지.”

“…….”

정곡을 푹, 찌르고 들어온 말에 가슴 깊이 숨겨 두었던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맞아. 나는 알도르 경을 완전히 믿지 않아.

그래서 감시를 붙인 거고.

그런데도 알도르 경을 믿는다고 나불나불 떠들었던 내 이중적인 면모가 역겨워 조금 구역질이 나왔다.

“아무튼 내가 직접 알도르 경이 레오폴드 영지의 공작저에 있는지 확인하고 알려 줄게.”

“……그럼 너무 늦어요.”

페르데스가 아무리 빨리 레오폴드 영지로 돌아간다고 해도 사흘은 걸렸으니까.

“안 늦어. 지금 바로 출발해서 늦어도 해가 뜨기 전까지 확인해서 알려 줄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설마?

“대현자님에게 부탁하시려고요?”

“맞아. 그 분의 도움을 받으면, 레오폴드 영지까지 단숨에 날아갈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터무니없는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페르데스가 말하니 믿음이 갔다.

실제로 그는 제국의 국경에서 수도까지, 단숨에 날아오기도 했고.

“그럼 제가 직접 갈게요.”

“아니. 이건 반드시 내가 가야 해.”

“어째서요?”

“그야 그건 나한테만 허락된 방법이거든.”

텔레포트가 그에게만 허락된 방법이라고?

약간 의아했으나, 페르데스와 대현자가 친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게다가 그대는 몸 상태도 안 좋으니, 내가 갈게.”

“하지만…… 더 당신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그런 생각 하지 마. 나는 조금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페르데스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웃었다.

“오히려 그대를 도울 수 있어서 기뻐.”

거짓이라곤 티끌만큼도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였다.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저리 웃을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날 도와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어떻게……!

“자존심 상하지…… 않으세요?”

황금색 눈동자에 바보 같은 내 모습이 비쳤다.

“아까 제가 그런 말을 했는데,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음. 화가 전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페르데스가 조금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무척 화가 났어. 내 마음을 몰라 주는 그대가 원망스럽기도 했고.”

그의 손이 거미줄처럼 내 손에 엉켰다.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가 되더라.”

“……후회요?”

“응. 그대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지 못한 거나, 결국 그대가 그런 모진 소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게 후회되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어.”

덧붙인 설명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내가 페르데스였다면, 후회하긴 커녕 몹시 분노하며 당장 떠났을 텐데.

내가 도와달라고 애원해도, 절대 도와주지 않았을 텐데.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터.

“보아하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

“……당연하죠. 지금 페르데스 님의 행동은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걸요.”

“그런가.”

페르데스가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사랑하면 이성이 마비가 되는걸.”

“사랑……?”

“그래.”

페르데스가 손깍지를 낀 채, 내 이마에 그의 이마를 살포시 댔다.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고.”

입술 언저리에서 나지막하게 번지는 숨결과 함께 그의 진심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스며든 진심은 그를 밀어내야겠다고 굳건하게 다짐했던 내 의지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렵게 그를 밀어냈는데 다시 받아 준다면, 두 번 다시 그를 밀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멀리하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땡볕 아래 놓인 셔벗처럼 의지가 빠르게 녹아내리면서 욕심이 고개를 든 탓이었다.

“……저는 페르데스 님의 마음에 보답해 드릴 수 없어요.”

“알아.”

미약하게 남은 의지로 밀어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다 알고도, 그래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밀어내지만 말아 줘.”

계속 부딪치는 마음이 조금 버거워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러니한 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가 나를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가 나를 계속 좋아해 줘서 다행이야.

그가 나를, 나를…….

……나는 왜 이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거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문에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덜컹거렸다.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 들면서,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이만 가 볼게.”

페르데스가 내 손을 놓고 물러났다.

나는 멀어지는 온기가 아쉬워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해 뜨기 전에 돌아올 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기다리지 말고 자고 있어. 돌아오면 깨워 줄게.”

“……전 아직 페르데스 님에게 그 일을 부탁하지 않았는데요.”

“그럼 지금 부탁하면 되겠네.”

페르데스가 어서 해 보라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진심으로 웃는 게 아닌, 나를 배려하기 위한 억지웃음인 게 약간 떨리는 눈꼬리에서 보였다.

사실은 내가 거절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도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억지로 웃는 거고.

이런 순간에도 그가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해 주다니.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는 종종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

“부탁 안 할 거야?”

조심스레 되묻는 목소리에도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달픈 눈을 마주하니 남아 있던 의지까지 녹아내렸다.

“부탁드릴게요.”

짤막한 한 마디에 페르데스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나만 믿고 있어! 빨리 다녀올게!”

“그리고 아직 페르데스 님을 믿고 있어요.”

페르데스는 당장 달려갈 것처럼 돌아섰으나, 한 발도 떼지 못했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며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아까 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저 제가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라고 하니 욱하는 마음에 했던 말이에요.”

“…….”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다시 돌아선 페르데스가 날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거리가 확 가까워진 만큼, 그의 체향이 폐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대도 신경 쓰지 마.”

“그럴 수는…….”

“이럴 때는 그냥 네, 라고 대답하는 거야.”

페르데스가 어서 해 보라고 요구해서,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네’라고 대답했다.

“착하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강아지가 된 것 같아 느낌이 조금 이상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라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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