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전쟁.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도 상당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페르데스의 시선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듯한 시선이었으니까.
“맞아요.”
거짓말을 해 봤자, 곧 들통날 테니 솔직하게 말했다.
“연합국을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켜, 제국을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거예요.”
“꼭 전쟁해야 해?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도 있잖아.”
“다른 방법이라면 어떤 거요?”
“그건…….”
뚜렷한 방법을 생각해 두고 뱉은 말은 아닌지 페르데스는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어떤 방법이든 전쟁보다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없어요. 이미 준비도 끝났고요.”
“…….”
“혹시 이 제국에 미련이 남으신 건가요?”
황자 신분을 버리고, 제국을 떠나 대륙을 여행하고 싶다고 하더니, 그새 생각이 바뀐 걸까?
의아해서 묻자, 꽉 다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걱정과 혼란이 뒤엉킨 황금색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정말로 전쟁을 일으켜도 괜찮겠어?”
“무슨 의미로 괜찮냐고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전쟁하면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을 거야. 황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말이지.”
페르데스가 내 양쪽 어깨를 세게 잡았다.
하필 멍든 자리를 정확하게 누르는 바람에 시큰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꾹 참으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데도 괜찮겠어? 아무렇지 않아?”
“괜찮고, 아무렇지 않아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아니. 거짓말이야.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면, 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테니까.”
그 말은 내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안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계획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그들은 함부로 말을 옮기고 다닐 사람이 아니니 페르데스가 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듯한 그 황금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더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델.”
머리 위로 페르데스의 간곡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은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분명 전쟁하지 않아도 제국을 대륙의 지도에서 없앨 방법이 있을 거야.”
“……꿈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아델.”
“제국에 미련이 남는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나는 페르데스의 손을 떼어 냈다.
“제국이 무너진다면, 페르데스 님은 더 이상 황자 대접을 받지 못하실 테니까요.”
“내가 고작 황자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페르데스는 보기 드물게 역정을 냈다.
“난 정말로 그대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전쟁 때문에 다치고 죽는 사람보다, 그들을 보며 아파할 그대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곁에 두지 않으려는 거였고.
아파하는 나를 보며 괴로워할 그의 모습이 눈에 보였으니까.
“……나가 주세요.”
“아델.”
“이럴 줄 알고 당분간 제국에 돌아오지 말라고 말한 거였는데, 마음대로 돌아오셨으니 더는 페르데스 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단호하게 내보냈더라면, 이렇게 감정싸움을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전부 내 잘못이었다.
조금만 더.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안일했던 생각은 또다시 내 발목을 잡고 말았다.
같은 생을 4번이나 반복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여기서 그만해요.”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단순히 발목이 잡히는 게 아닌 아예 잘릴 테니, 이제 정말로 끝내야 할 때였다.
“애초에 페르데스 님에게 요청한 건, 제가 복수의 기반을 다질 때까지 이중 첩자 노릇을 하며 시간을 벌어 달라는 거였죠. 그 역할이 끝났으니, 더는 저를 방해하지 말고 떠나 주세요.”
“그 말은 내가 그대의 곁에 있는 게 방해가 된다는 건가?”
“네.”
계속 시선을 피하면 의심할 테고, 내 의지를 보여 주고 싶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그렇고, 지금만 해도 저를 방해하고 있잖아요.”
“그건 다 그대를 위해서…….”
“저를 위한다면 그러시면 안 되죠.”
나는 페르데스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를 좋아한다는 말도 하시면 안 됐어요.”
“……!”
크게 충격을 받은 듯 황금색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페르데스가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 것조차 방해가 된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방해돼요.”
내 입 안에도 가시가 돋친 건지, 말을 할 때마다 따끔거렸다.
“그러니 제발 떠나 주세요. 부탁드려요.”
시작은 단호했지만, 결국 애원으로 끝을 맺었다.
내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난……!”
똑똑-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바닥을 바라보던 페르데스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여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공작 각하. 의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곧이어 마티나 백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 역시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휙 돌아섰다.
그리고 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다소 과격하게 문을 열었다.
“아, 황자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마티나 백작이 말을 걸었지만, 페르데스는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마티나 백작은 약간 뻘쭘해하며 페르데스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내게 물었다.
“전하와 싸우셨습니까?”
“아니.”
싸운 게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공격한 거지.
“의원을 데리고 왔어?”
“네.”
마티나 백작이 손짓하자, 의원이 들어와 공손히 인사했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의원도 여자였다.
“비밀 서약을 했으니, 오늘 밤에 보고 들은 것들을 절대 외부에 유출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럼 전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치료를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하니, 마티나 백작은 밖으로 나갔다.
내가 옷을 벗자, 의원은 가까이 다가와 왕진 가방을 펼쳤다.
“가장 아프신 곳이 어디십니까?”
“지금은 아프지 않지만, 가장 심하게 다친 곳이라면 왼팔이네.”
내가 왼팔을 보여 주자, 의원은 꼼꼼하게 살핀 뒤 마땅한 처치를 했다.
다른 곳의 상처도 전부 치료한 그녀는 소견을 말했다.
“이곳저곳에 상처가 많긴 하지만, 왼팔을 제외하고 그리 심한 곳은 없으니 약만 잘 바르시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
의원이 탁자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저 안에 치료 약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왼팔의 상처는 꿰매 뒀으니, 그동안은 소독만 하고 일주일 뒤에 실밥을 푸시면 됩니다.”
“마비 독은 해독할 수 있나?”
“이미 마비가 거의 풀린 상태인지라 따로 해독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룻밤 푹 주무시고 나시면, 다 풀리실 겁니다.”
의원은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다시 자신을 찾아 달라고 말을 덧붙였다.
“따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의원이 나가고, 나는 옷을 벗은 김에 물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그 와중에 시선이 자꾸만 문 쪽으로 향한 건, 하찮은 미련 때문이었다.
혹시 페르데스가 돌아오진 않을까.
그러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시 냉정하게 내쫓아야 하나, 아니면 실수였다고 사과해야 하는 걸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지만, 몸을 다 닦을 때까지 페르데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거잖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돌아올 리가 없었다.
잠시나마 페르데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작게 실소하며 의원이 두고 간 상자를 열었다.
“뭐야, 이게.”
당연히 약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에 든 건 작은 쪽지였다.
누군가 의원을 통해 내게 보낸 모양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목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확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쪽지를 펼쳐 확인했다.
* * *
아델이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그 시각.
페르데스는 담장 너머까지 뻗은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에 걸터앉아, 불빛이 하나씩 사라지는 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전경을 보던 그는 문득 인기척이 느껴지자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 층 아래, 비블로스가 앉아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혹시 그 여자한테 차였냐?”
“네.”
돌아온 대답에 장난기가 가득했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
비블로스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렇군. 힘내라. 내가 해줄 말은 그것밖에 없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격려에 페르데스는 쓰게 웃었다.
“황제가 싫다는 데도 매달렸다는 어머니가 이해 안 됐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될 것 같아요.”
그 역시 아델에게 매달리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모진 소리를 들었는데도 여전히 그녀가 좋았고, 곁에 있고 싶었다.
바보 같게도.
“차인 김에 깔끔하게 포기해.”
어느새 그의 옆자리에 앉은 비블로스가 페르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게 너를 위해서도, 그 여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봤자, 서로 상처받는다고.”
“그건 경험에서 나온 충고입니까?”
“맞아. 참고로 말하면 나는 차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해 두죠.”
“그렇다고 해 두는 게 아니라 정말로 차인 적이 없다니까!”
펄펄 날뛰는 비블로스를 보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지금 당장 가야 해.”
작게 웃음을 흘리던 페르데스는 문득 아델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쪽을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