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1/262)

217화

마티나 백작이 나간 뒤, 나는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그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생각해 봤다.

“아버지가 황태자 전하를 구하다가 몬스터에게 당해 돌아가신 장면을 본 목격자가 여럿이다.”

목격자들이 작성한 진술서도 직접 봤었다.

“그런데 살해를 당했다니. 그 말은 누군가 몬스터한테 황태자를 공격하는 척하며 아버지를 죽이라고 명령이라도 내렸다는 건가?”

“저도 그 부분이 의아해서 알아봤는데……. 그 목격자들이 전부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때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근거가 없을뿐더러 소문도 금방 잠잠해져서 뜬소문이겠거니, 하고 넘겼습니다.”

흐릿해진 의식 속에 마티나 백작의 말이 화살처럼 꽂혔다.

“그런데 오늘 각하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쩌면 그 소문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째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가.

“물론 여전히 근거가 없는, 단순한 제 의견일 뿐이니 흘려들으셔도 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흘려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황실에 충성하는 입장이었다면, 황제가 내 목숨을 노리지 않았다면 헛소문으로 치부하며 넘겼겠지만.

황제의 손에 여러 번 죽었던 터라 더욱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뜬소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소문이 돈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가령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뜨렸다던가.

만약 그런 거라면 그 사람의 목적은 황실과 레오폴드 공작가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일 테니, 이 소문은 내 귀에 들어왔을 터.

한데 그러지 않고, 몇몇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사라진 걸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은데.”

“그 소문?”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한 손에는 쟁반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옷가지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페르데스가 가지고 온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물수건들이 있었다.

“노크를 몇 번이나 했는데도 대답이 없길래, 혹시 쓰러졌나 싶어 걱정돼서 그냥 들어왔어. 불쾌했다면 미안.”

“괜찮아요.”

내가 페르데스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그것보다 페르데스가 들고 있는 옷, 아무리 봐도 여성용 실내복이었다.

“그 옷, 제 건가요?”

“맞아.”

“이런 건 사용인을……”

“사용인한테 다친 걸 보여 주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직접 가져왔지.”

그거야 그렇지.

“이 물수건은 뭐예요?”

“몸을 닦으라고 가져온 거야.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으니까.”

그런 것까지 생각해 준 건가.

“아직 마비가 안 풀려서 닦기 힘들 테니까, 내가 해 줄게.”

“괜찮아요.”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가 내 몸을 직접 닦아 주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맨살을 보여 줘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내가 안 괜찮아.”

그래서 거절했는데, 페르데스가 고집을 꺾질 않았다.

“아까 그대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이번에는 내 부탁을 들어줘.”

하아, 정말이지.

그걸 걸고넘어지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손이 닿지 않는 등만 부탁해요.”

등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옷을 벗는 거야?!”

“그야 등을 닦으려면 옷을 벗어야 하잖아요.”

“아!”

반응을 보아하니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네.

하여간 평소에는 똑 부러지면서, 이상한 곳에서 맹한 모습을 보여 준다니까.

“크흠. 혹시나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이상한 의도는 없었어.”

“알아요.”

만약 그런 의도가 보였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등을, 조금만, 그러니까, 음…….”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페르데스를 보니, 나 역시 조금 당황스러웠다.

부끄럽기도 했고.

“그냥 안 하는 걸로 할게요.”

“아니, 아니야! 할게. 할 수 있어. 하게 해 줘.”

페르데스가 다급하면서도 애절하게 말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데스는 눈을 가리며 돌아섰다.

“돌아서 있을 테니까, 천천히 벗어. 음, 그러니까 등만 보여 주면 돼.”

“……네.”

아까는 조금 창피할 뿐, 떨리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몹시 떨렸다.

입안이 바짝 마르기도 했고.

아직 왼손을 제대로 쓰지 못해, 옷을 벗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차마 페르데스에게 이런 것까지 도와달라고 하지 못하고 끙끙대며 벗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법도 하건만, 페르데스는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나는 블라우스를 거꾸로 입으며, 페르데스에게 등이 보이도록 소파 등받이를 잡고 돌아앉았다.

“다 됐어요.”

등 뒤로 페르데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물수건이 맨살에 닿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등을 보여 줘야 하기도 하고 그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서 돌아앉은 건데, 어째서인지 이게 더 부끄러웠다.

그나마 그의 맨손이 닿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등에 멍이 많네. 아프겠다.”

“전혀요. 그리고 멍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왼팔을 내줄 각오도 했었는데, 멍이 무슨 대수일까.

“페르데스 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고마운 걸 알면 다음부터는 몸 좀 사려.”

빈말이라도 그러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벌써 수도에 온 거예요?”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레오에게 듣자 하니, 이틀 전에 국경을 넘으셨다면서요.”

“벌써 그 남자랑 연락했어? 어떻게?”

“어떻게 하긴요. 마법 통신 반지로 연락했죠.”

페르데스의 미간 사이 간격이 확 좁아졌다.

“……만 준 게 아니었네.”

“네?”

“아니, 아무것도.”

그런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나.

“수도는 대현자님의 도움을 받아서 왔어.”

“대현자라면, 아까 봤던 그 사람이요?”

아,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인가?

“맞아.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는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말 못 해. 미안.”

“괜찮아요.”

그 부분은 딱히 궁금하지 않기도 하고, 대충 짐작이 갔다.

보나 마나 텔레포트 같은 마법을 썼겠지.

드래곤은 마법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장거리를 텔레포트로 이동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페르데스는 내 등과 어깨를 세심하게 닦아 주었다.

그 손길이 마치 깨진 유리를 닦는 것처럼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분과 그렇게 헤어졌는데, 괜찮나요?”

“괜찮아. 뭔가 알아내시면 알아서 날 찾아오실 거야.”

“하지만 그분이 절 습격한 놈들의 시신을 데리고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왜? 필요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서 미끼까지는 되지 못하겠지만, 황제랑 귀족들에게 경고할 용도로는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황제는 알겠는데, 귀족들은 누구?”

“두루두루 경고하는 거예요. 나한테 덤비면 이렇게 된다, 뭐 이런 느낌으로?”

“흐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는 묘한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대현자님이 오면 말해볼게.”

“바로 연락해 보면 안 돼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말이야.”

연락할 방법이 없다니?

놀라서 돌아보자, 페르데스는 더 기겁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들고 있던 수건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그, 그, 오, 옷.”

아, 그러고 보니 나 반나체 상태였지.

그래도 가슴 부위는 셔츠로 잘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을 텐데, 뭘 저리 부끄러워하는지.

숫기 없는 그의 모습이 조금 귀여워 웃음을 흘리며 다시 돌아앉았다.

“연락할 방법이 없으면, 그분이 필요할 때 어떻게 불러요?”

크흠, 등 뒤에서 커다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페르데스가 새 수건으로 내 등을 닦으며 말했다.

“그, 나중에 만나면 통신 반지라도 달라고 할게.”

“네. 혹시 통신 반지가 필요하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걸 드릴게요.”

“그대가 가지고 있는 거라면…… 혹시 나랑 주고받은 통신 반지를 말하는 거야?”

“맞아요.”

“…….”

돌연 대화가 끊기더니, 수건이 멀어졌다.

끝난 건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수건이 다시 등에 닿았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화가 난 듯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대현자한테 통신 반지를 주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네.

“그래요.”

꼭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싫다는 걸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황궁 기사들은 어떻게 됐어요?”

“돌려보냈어.”

“순순히 돌아가던가요?”

“그럴 리가. 그대의 얼굴을 보고 가야겠다며 빡빡 우기는 거, 황자 신분을 내세워 쫓아냈어.”

평소에는 하등 쓸모없지만, 이럴 땐 참 편리한 신분이라며 그는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었다.

다행히 기분이 풀린 모양이네.

“그리고 그놈들을 쫓아내기 전에 슬쩍 떠봤는데, 그대가 습격당한 일에 대해선 모르는 눈치더라.”

“그렇겠죠.”

만약 알았다면 내가 백작저를 나가는 순간, 날 봐야겠다며 난리를 부렸겠지.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

“말씀하세요.”

“나한테 손을 내밀었을 때, 대륙에서 제국의 이름을 없애겠다고 말했었지.”

처음으로 그의 맨손이 맨살에 닿았다.

흠칫, 놀라며 돌아보자, 페르데스가 좀 더 세게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게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였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