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이렇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빠르게, 그리고 협박하듯이 말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저들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습격을 당하는 바람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졌다.
거기다 다치기까지 했으니, 얼른 끝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협박하듯이 말했다.
생각했던 것만큼 자세한 설명도 하지 못했고.
그러자 북부령 귀족들의 얼굴에 불만과 반발심이 서렸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흔적도 역력했고.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고 내 제안을 받아 달라고 우기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지.”
마음 같아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제 와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웃겼고.
“이틀 뒤, 내 의지를 보여 주겠다. 그걸 본 뒤, 나를 따를지, 아니면 황실을 따를지 결정하면 돼.”
이왕 이렇게 된 거 적당히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그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끼만 던지고 일어섰다.
“아.”
앞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술에 취한 것처럼 눈앞이 핑 돌면서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조심.”
그와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 내 허리를 휘어 감듯이 잡았다.
페르데스였다.
조금 전만 해도 창고 문 앞에 있었는데, 언제 다가온 거지?
“괜찮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의 콧잔등이 실룩거렸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마티나 백작도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른 귀족들도 걱정된다는 듯 날 보고 있었다.
페르데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똑바로 서서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괜히 오기를 부렸다가 지금보다 더 창피를 당할 수 있으니, 자존심을 조금 꺾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오다가 작은 사고가 있어서, 조금 다친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잠깐만. 이것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짧은 순간,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페르데스의 가슴에 살짝 기댄 뒤, 혼잣말하듯,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레오폴드 영지가 탐난다고 해도 암살자까지 보내서 나를 죽이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누가 암살자를 보냈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황제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귀족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녔다.
몇몇은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다친 게 도움이 됐네.
좀 더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었으나, 이제 정말로 한계였다.
나는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마티나 백작에게 말했다.
“이만…… 백작저로 돌아가지.”
* * *
현재 나는 도저히 말을 탈 수 없는 상태였기에, 마티나 백작은 급하게 마차를 구해 왔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백작저로 돌아가는 내내 내 정신은 풍랑을 맞아 바다를 부유하는 돛단배처럼 암흑 속을 떠다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마티나 백작저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에 앉은 마티나 백작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빈 옆자리를 쳐다봤다.
페르데스가 안 보이네.
분명 같이 마차에 탄 것 같은데.
“황자 전하께선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물어보지 않아도 내가 누굴 찾는지 안다는 듯 마티나 백작이 말했다.
“전하께선 직접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을 테니, 그 틈을 타서 몰래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몰래 나온 걸 말한 건가?”
“전하의 도움을 받으려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지.”
그의 말처럼 도움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인지 말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단지 도움을 받는 상대가 페르데스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앞으로 벌어지는 일에 그가 연관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머나먼 타국까지 보냈는데, 결국 엮이게 되었다니.
“하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끌려 올라왔다.
세상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될 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계속 삐걱거리니 짜증이 나면서도 두려웠다.
가장 중요한 일까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까 봐.
그래서 이 빌어먹을 길을 다시 걸어야 할까 봐 무서웠다.
그때도 내가 지금처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하아.”
“이런. 많이 아프신 모양입니다.”
내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이유가 아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마티나 백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택이 아닌 병원으로 갈 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내가 저택을 나와 돌아다닌 게 전부 다 들통났겠지.”
“하지만 공작 각하를 공격하라고 사주한 사람이 정말 그분이시라면…….”
마티나 백작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그는 우리 둘밖에 없는 마차를 괜히 한 번 둘러보곤,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각하께서 백작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빠져나온 것도, 그리고 북부령 귀족들을 만나 그런 이야기를 나눈 것도…….”
“전자는 알 수 있지만, 후자는 모를 거다. 날 쫓아오던 놈들은 창고에 도착하기 전에 전부 죽였거든.”
그러고 보니 그놈들의 시신은 어떻게 됐지.
대현자가 디아볼로스를 연구하느라 데리고 간 것까지는 알겠는데,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페르데스라면 뭔가 알고 있을 테니, 조금 이따가 만나면 물어봐야지.
어떻게 벌써 수도에 도착했는지도.
“……일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나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상념을 밀어냈다.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뭐라고 하는지 듣지 못했어. 미안하지만 다시 말해 줄래?”
마티나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렇게 말하니까 더 신경이 쓰이는데.
똑똑-
그냥 말하라고 하려는데,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티나 백작저의 집사였다.
사용인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외출을 아는 사람이기도 했고.
“이제 들어와도 괜찮다고 황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어서 들어가시지요, 각하.”
“……그래.”
아까처럼 일어서자마자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비가 조금 풀렸는지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던 정신도 제법 또렷해졌다.
반면 직접 베였던 왼팔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백작저의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왼팔을 내려다봤다.
해독제를 먹긴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한담.
병원에 가자니, 내가 다친 걸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 같아 꺼려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면, 몰래 움직이기 힘들어지니까.
……뭐, 그 일이 터지면 금방 흩어지겠지만.
“병원에 가시는 게 꺼려지신다면, 거리의 의원이라도 불러올까요?”
마티나 백작은 이번에도 내가 걱정하는 바를 정확하게 집으며 물었다.
평민들을 치료하는 의원들을 거리의 의원이라고 불렀다.
“그래. 그게 나을 것 같아.”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거리의 의원들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보다 실력이 부족할 텐데요.”
“괜찮아.”
실력이 부족해도 마비 해독약과 상처 치료 약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이 상태로는 황궁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의원을 데리고 오면서, 묵으실 침실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이럴 땐 눈치 빠른 사람이 참 좋단 말이지.
“여러모로 백작에게 민폐를 끼치네. 미안.”
“아닙니다. 같은 배를 탄 동지로서 이 정도는 해야지요.”
지금 그가 뭐라고 한 거지?
같은 배를 탄 동지라고?
“그 말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깜짝 놀라며 묻자, 마티나 백작이 소리 내서 웃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설마 제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바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거든.”
설명을 제대로 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니 적어도 이틀 뒤까지는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제게는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이미 이만큼 공작 각하를 도와드렸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면 그 모양새도 우습지 않습니까.”
“……의도치 않게 끌어들여서 미안.”
“아닙니다. 처음부터 독립할 생각인데 도와달라고 하셨어도 도와드렸을 겁니다.”
한순간 마티나 백작의 입술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각하께선 언제부터 그분이 레오폴드 영지를 삼키려고 한다는 걸 아신 겁니까?”
“오래전부터 알았어.”
지금 생으로 따지면 3년 정도밖에 안 됐지만, 지난 생까지 더하면 굉장히 오래됐다.
내 대답을 들은 마티나 백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도는 건가.”
“그런 이야기?”
“드, 들으셨습니까?”
“그래.”
마티나 백작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거 없는 소문이긴 하나, 각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나는 뭐든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나 백작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대 레오폴드 공작 각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구하려다 돌아가신 게 아니라 사실은 살해당한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