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니콜 테시스의 물류 창고.
마티나 백작은 회중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창고 안을 돌아다녔다.
현재 시각 9시 20분.
8시 30분까지 온다던 아델은 벌써 한 시간째 소식이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한 예감이 커졌다.
마티나 백작은 당장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꼬리를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기다리게 할 생각입니까, 마티나 백작.”
바로 창고에 모인 북부령 귀족들이었다.
마티나 백작은 아델이 부탁한 대로 비밀리에 북부령 귀족들을 이곳에 소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창고에 온 북부령 귀족들은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자신들을 불러냈다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고급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바닥에 푹신한 카펫을 깔아 놓는 등 나름 준비를 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창고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 그들이 언짢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마티나 백작이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참고 기다렸건만, 밤이 깊어 가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억누르고 있던 불만들이 속출했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기다린 것 같습니다만.”
“전 한 시간 반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슬슬 우리를 이곳에 부른 이유를 말해 주세요, 백작님.”
“으음, 그것이…….”
이곳저곳에서 불만 어린 요청이 쇄도하니, 마티나 백작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아델은 그녀가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슬슬 한계였다.
이대로 있다간 귀족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말하려는 그때, 거대한 창고 문이 열렸다.
마티나 백작은 물론 그에게 불만을 표현하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
머리부터 음영이 길게 드리운 두 사람이 성큼성큼,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하네.”
바로 아델과 페르데스였다.
드디어 그녀가 왔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마티나 백작은 아델의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 공작 각하. 옷에 피가…….”
“이곳에 오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거든.”
아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산뜻하게 말했다.
“그것 때문에 늦은 거니 부디 양해 바라네.”
“그, 그러시군요.”
아델에게 말을 건 귀족이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사고는 확실히 아니었다.
만약 작은 사고였다면 옷에 피가 저렇게 묻을 일도, 아델의 얼굴이나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길 일도 없을 테니까.
‘습격이라도 받은 걸까요?’
‘그런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공작 각하를…….’
‘누가 공작령의 화산을 일부러 폭발시킨 것도 그렇고, 사건 사고가 참 많군요.’
귀족들이 눈짓으로 대화하는 사이, 페르데스는 창고 문을 닫고 보초를 서듯 그 앞에 섰으며 아델은 가장 상석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하게 걸어오긴 했지만, 실제로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다리에는 감각이 희미했고, 직접적으로 당했던 왼쪽 팔은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열이 나는지 몸이 조금씩 뜨거워지면서, 머리도 어질어질했고.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하고, 귀족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아델은 꾹 참고 버텼다.
“의도치 않게 자네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하지.”
아델이 약간 고개 숙여 사과하자, 소리 없이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다시 고개를 든 아델이 입술 끝에 화사한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도 하겠네.”
“……저희를 이곳으로 부른 분이 마티나 백작이 아니라 공작 각하셨습니까?”
“그래. 자네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마티나 백작에게 부탁했네.”
“저희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괜히 시간을 질질 끌지 말고 얼른 말하라는 듯한 요구에 빈정이 상할 법도 하지만.
아델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흔들림 없이 말했다.
“나는 레오폴드 공작령을 단순히 제국에 속한 영지가 아닌 하나의 국가로 만드려고 하네.”
라는 엄청난 이야기를.
“지금 무슨 말씀을……!”
“구, 국가라니!”
아델이 던진 폭탄에 맞은 귀족들은 무척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건 마티나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화등잔만큼 크게 뜨며 아델에게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공작 각하?”
“그래. 진심이다.”
“하지만 그건…….”
마티나 백작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아델이 웃으며 대신 말했다.
“제국과 황실에 대한 반역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마티나 백작이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귀족들도 마티나 백작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 일제히 침묵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게.”
“…….”
“앉으래도.”
권유인 것 같으면서도 다소 강압적인 명령에 귀족들은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레오폴드 영지를 비롯한 제국의 북쪽령은 본디 제국에 속한 땅이 아니었다.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지.”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고요히 창고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북부령이 제국에 속하게 된 건, 초대 레오폴드 공작이 황실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지.”
초대 레오폴드 공작은 레드 드래곤에게 받은 레오폴드 영지를 제국에 귀속시켜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대신, 공작위를 받고 자치권을 인정받기로 황실과 계약했다.
그 모습을 본 북부령의 다른 지주들도 황실과 계약을 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제국의 북부령을 만들어 낸 것.
레오폴드 공작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북부령은 자치권이 없다는 거였다.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영지는 레오폴드 공작령이 유일했다.
“내 가문은 계약대로 황실에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 현 황제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레오폴드 영지를 완전히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
새삼 황제가 지금까지 제게 한 짓을 떠올린 아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레오폴드 영지는 엄연히 레오폴드 가문의 것. 황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넘겨줄 생각이 없어.”
“…….”
“그런데 황제가 오랜 신뢰와 계약을 깨면서까지 레오폴드 영지를 넘보고 있으니, 나는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게 내 의지고, 곧 가문의 의지다.”
아델의 말을 끝으로 창고 안에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다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 입을 꾹 다문 채 책상이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머리는 빠르게 굴러다니며, 아델이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자신들에게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의중은 이미 짐작됐지만 차마 그걸 입에 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가운데, 아델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 레오폴드 영지가 황제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다음은 그대들의 영지 차례일 거다. 욕심이 많은 황제는 절대 레오폴드 영지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
“그러니 나는 그대들이 나와 뜻을 함께하며, 황제와 맞서 싸워 주길 바란다.”
이 부분은 아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짐작했던 부분인지라, 그녀가 처음 폭탄을 던졌을 때만큼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귀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눈동자만 굴리는 가운데, 마티나 백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만약 저희가 공작 각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른 귀족들 역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아델을 주시했다.
그러자 아델이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글쎄. 어떻게 되려나.”
“…….”
등골이 오싹해지는 표정과 말투에 마티나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의 표정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중에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듯 몸을 달싹이며 창고 문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비록 페르데스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델이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자네들에게 무슨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정말 없는 게 맞겠지.
겨우 아델에게 정착한 수십 개의 눈동자가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설령 자네들이 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해코지를 하거나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거야.”
지금 당장은 그러겠지만, 나중에는 할 수 있다.
숨은 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귀족들의 표정이 좀 더 핼쑥해졌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레오폴드 공작가에 의탁하고 있는 터라 그녀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레오폴드 공작령이 황제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다음은 그들의 차례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그녀의 뜻에 동참하자니,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커서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아델이 이렇게 하겠다고 뚜렷하게 설명해 준 것도 없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문들이 그들의 결정을 막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고 내 제안을 받아 달라고 우기는 건 너무 양심없는 짓이지.”
그런 귀족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아델이 말을 이었다.
“이틀 뒤, 내 의지를 보여 주겠다. 그걸 본 뒤, 나를 따를지, 아니면 황실을 따를지 결정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