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진짜 페르데스인가?
그럴 리가.
불과 이틀 전에 코스모스 상단의 용병으로 위장해서 제국의 국경을 넘은 그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국경에서 수도까지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닷새는 걸렸으니까.
그러니 그일 리가 없는데.
“괜찮아?”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무리 봐도 페르데스가 맞았다.
두 눈을 비비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다시 확인해 봐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마비 독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건가?
아니면 꿈?
잘 버틴 줄 알았는데, 결국 적에게 당해 기절해서 꿈이라도 꾸는 걸까?
“많이 다친 것 같……!”
어느 쪽인지 확인하고 싶어 나는 가까이 다가온 페르데스의 뺨을 세게 꼬집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뭐하는 거야?”
“아프세요?”
“당연히 아프지!”
그렇다는 건 꿈은 아니라는 건데.
“역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응? 헛것이 보여? 머리를 다친 건가?”
페르데스가 걱정스럽게 말하며 내 뺨에 손을 살포시 가져다 댔다.
손바닥 전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머리 쪽은 괜찮아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바로 병원 가서 진찰 받자.”
“진짜…… 페르데스 님이네요.”
이건 절대 헛것이나 환상이 가질 수 없는 거였다.
“페르데스 님이 어떻게 이곳에 계시는 거죠? 이틀 전에 국경을 통과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걸 어떻게……. 아, 그 남자가 말했구나.”
조금 귀찮게 됐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페르데스에게 재차 물어보려던 나는 살기가 느껴지자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페르데스를 향해 떨어진 검을 단검으로 막아냈다.
캉,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몸이 마비되는 바람에 적을 밀어내긴커녕 버티는 것도 힘들었다.
“얼른……”
도망치라고 말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들어왔던 구멍을 통해 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나와 대치하고 있는 적을 가뿐하게 처리했다.
이게 무슨……?
당황한 나와 달리 페르데스는 산뜻하게 말했다.
“결국 도와주실 거면서 튕기시기는.”
남자가 인상을 팍 쓰며 페르데스를 노려봤다.
“시끄럽다. 내가 네 보모인 줄 알아?”
“그럴리가요. 그저 제가 무사해야 대현자님도 제게 부탁하실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잠깐만. 저 남자가 대현자라고?
그렇다는 건 드래곤이라는 거잖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로만 듣던 존재를 마주한 나는 깜짝 놀라며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라기엔 소년의 느낌이 강했고, 그렇다고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대현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손바닥이 드리웠다.
페르데스였다.
그는 나를 그쪽으로 살짝 잡아당기더니, 볼멘소리로 말했다.
“질투나니까, 너무 빤히 보지 마.”
“지랄하네.”
그와 동시에 신랄한 욕이 날아오니, 당황할 틈도 없었다.
곧이어 과격한 타격음이 잇따라 들렸다.
나는 황급히 내 눈을 가리는 페르데스의 손을 치웠다.
그러자 적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멱살을 잡고 있는 대현자가 보였다.
그의 앞에는 나와 싸웠던 다른 적들이 겹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나와 싸우면서 지치고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쉽게 당할 정도로 약한 놈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하다니. 놀라웠다.
드래곤이라더니, 정말 강하구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다니.”
대현자가 멱살을 비틀며 적을 벽 쪽으로 밀쳤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그 마음가짐, 받아들여 주지.”
“안 돼요!”
대현자가 적들을 죽이려고 하자 나는 다급하게 말렸다.
“죽이면 안 돼요!”
“하?”
그러자 대현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날 쳐다봤다.
“죽이지 말라니. 설마 이 놈들이 너를 공격했다는 걸 잊은 건 아닐 테고. 왜지? 설마 알량한 동정심 때문인가?”
“그럴 리가요.”
저 놈들을 동정하지도, 동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럼 뭐 때문이지?”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야 해요.”
저들과 싸우면서 짐작가는 사람이 있지만, 단순한 심증이니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 거라면 한 놈만 살려 두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죠.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살려야 하는 놈을 지금 대현자님이 붙잡고 계시네요.”
내 말에 대현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멱살을 잡은 상대를 쳐다봤다.
“그런가?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은 놈들인데.”
그의 말대로 적들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입고 있는 옷도, 심지어 체구도 똑같아서 그냥 보면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저 놈을 콕, 집어서 지목한 이유는 바로 그와 검을 마주한 순간 누군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셔 안드리아.”
내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역시 어셔 안드리아가 맞구나.
하긴 내가 저 놈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가면을 벗기려고 다가가려는데, 대현자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만.”
그와 동시에 페르데스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컥.”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어셔 안드리아가 갑자기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대현자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그의 가면을 벗겼다.
어셔 안드리아의 맨얼굴을 본 대현자의 얼굴은 더욱 경직됐다.
“역시.”
뭐가 역시라는 거지?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에 나 역시 불안해졌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물어보려는데, 페르데스가 내 어깨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페르데스를 돌아보며 요구했다.
“놔주세요.”
“아니. 그대는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말은 페르데스 님은 저 분이 왜 저러시는지 아신다는 거군요.”
“디아볼로스.”
페르데스에게 물어봤는데, 대현자가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바닥에 쓰러진 감시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놈들 몸에 디아볼로스가 새겨져 있었다.”
“디아……볼로스요?”
“그래. 설마 그걸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현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다행히 바보는 아니군.”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대현자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페르데스가 대현자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전부 다 디아볼로스가 있습니까?”
대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페르데스에게 적의 손등을 보여 주었다.
손등에는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같은 놈의 짓이군요.”
“전부 죽은 건가요?”
전자는 페르데스가, 후자는 내가 물어본 거였다.
대현자는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페르데스만 보며 대답했다.
“아마 그렇겠지. 그것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명백한 무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도 내가 싫은 모양이네.
“이렇게 많은 놈들의 몸에 디아볼로스를 새기려면 그만큼 많은 생명력을 소모해야 하는데, 이런 짓을 했다는 건 그만큼 정신이 나간 놈이라거나…….”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지.
“아.”
나는 어셔 안드리아에게 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몸이 완전히 마비된 탓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겨우 버티고 있던 다리가 꺾이면서 몸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졌다.
“조심!”
다행히 페르데스가 부축해 준 덕분에 꼴사납게 쓰러지진 않았다.
“괜찮아?”
“네. 괜찮긴 한데, 조금 더 붙잡아 주세요. 마비 독에 당해서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거든요.”
“마비 독?”
한순간 페르데스의 눈이 커졌다.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는 거지?”
“어, 그게…….”
“아니다. 다친 그대를 두고 디아볼로스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내가 미친 거지. 그래. 내가 미쳤던 거야.”
페르데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일명 공주님 안기로, 이 자세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거절할 힘조차 없어 얌전히 안겨 있었다.
“지금 당장 의원에게 가자. 데려다 줄게.”
대현자가 물었다.
“그럼 여긴 어떻게 할 거지?”
“저희가 돌아올 때까지 적당히 치워 두세요. 어차피 전부 죽어서 증인으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전부 죽었다는 건 어셔 안드리아도 죽었다는 거겠지.
그를 이용해서 그림자 속에 숨은 황제를 끌어내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상관없었다.
그대로 죽이면 되는 거니까.
“그럼 내가 데리고 가서 연구해도 되지? 마침 디아볼로스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잘됐네.”
“마음대로 하시죠. 저는 그녀를 의원에게 데리고 가야 하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대현자는 우리가 가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페르데스는 나를 안아 든 채, 비밀 지하 통로를 빠져나왔다.
피비린내가 가득한 통로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굳어 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마차를 빌려야 할 것 같은데, 근처에 마차 대여소가 있으려나.”
“트램가에 마차 대여소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 그런가. 그럼 어떡하지.”
“그리고 저는 병원에 가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듯 주변을 살피던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병원에 가지 않겠다니?”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어딘지 몰라도 병원부터 가. 심하게 다쳤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델.”
“전 반드시 가야 해요.”
나는 페르데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애원했다.
“제발 그곳으로 데리고 가 주세요.”
걱정 어린 황금색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부탁드려요, 페르데스 님.”
“……하아.”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난 정말로 그대한테 약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