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3황자가 ‘다시’ 이야기하자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더 급한 일이 있으니 무시하고 기사단을 나섰다.
곧바로 잠시 머무는 궁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러자 같이 기사단에 갔던 시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방금 돌아오셨는데, 또 나가시는 건가요?”
“그래. 마티나 백작과 저녁을 먹기로 약속해서 말이야.”
시녀를 잠시 내보낸 뒤, 이것저것 챙기고 있는데 항상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서 붉은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레오와 연결된 통신 반지를 넣어 둔 주머니였다.
나는 최대한 문과 창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통신을 연결했다.
“무슨 일이야?”
말을 전해 주는 것 말고 달리 시킨 일이 없어, 이렇게 연락이 올 이유도 없는데?
-……공작 각하.
“응.”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부터 들으시겠습니까?
데자뷔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 같은 말을 들었고, 잇따라 충격적인 소식도 들었던 터라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 그래? 무슨 사고라도 쳤어?”
-사고를 쳤다고 해야 할지, 안 쳤다고 해야 할지…….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무슨 일인데?”
-그래서 어떤 것부터 들으실지 물어본 겁니다.
그냥 말하면 될 것이지, 날 시험하는 것 같아 조금 짜증 났다.
나는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그럼 나쁜 소식부터.”
-국경 지대 마을에서 4황자 전하를 뵀습니다.
“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황급히 입을 막으며 문을 쳐다봤다.
다행히 밖에선 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나는 처음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다급하게 물었다.
“국경 지대 마을에서 페르데스 님을 뵀다고?”
-네. 무슨 일인지 페르데스 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게다가 용병 등록까지 하셔서 상단 일을 찾고 계시더라고요.
위조 금화 사건 때문에 검문이 엄격해졌으니, 상단의 의뢰를 받은 용병인 척하며 제국으로 들어오려고 했구나.
어쩐지 순순히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몰래 돌아오려고 그랬던 거였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사람이라니까.
……그런데 잠깐만.
“레오, 넌 왜 국경 지대 마을에 있었던 거지?”
그는 햅번이나 그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설마 너도 내 말을 어기고 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건가?”
-……죄송합니다, 각하.
레오는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건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분명 당분간 제국에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게, 슬슬 타국 음식이 질리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서…….
“네 고향은 제국이 아닐 텐데.”
할 말이 없는지 레오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말을 안 듣는 건 똑같네.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끓어올라 왔다.
“그래서 국경 지대에서 페르데스 님을 만난 게 나쁜 소식인가?”
-아니요. 그건 조금 나쁜 소식이고, 진짜 나쁜 소식은 4황자 전하께서 코스모스 상단의 용병으로 고용돼서 같이 제국에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페르데스는 보통 사람보다 눈치가 빠를뿐더러, 코스모스 상단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되지도 않는 노예들로 가득 찬 상단을 보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파헤치려고 했겠지.
설마……?
“혹시 더 나쁜 소식은 페르데스 님이 전부 눈치채셨다는 거야?”
-전부 눈치챈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레오와 달리 무게가 있는 목소리.
“로고스 경?”
-오랜만입니다, 공작 각하.
“당신이 왜 레오와 같이 있는 거지?”
-이 남자가 제게 공작 각하의 말씀을 전해 주면서, 자신도 같이 오라고 했다고 말했거든요.
-으악, 그걸 사실대로 말하면 어떡해요!
로고스 경의 말 뒤로 절규하는 레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단순히 제국에 돌아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해서 코스모스 상단에 붙었단 말이지.
“레오.”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냥 조금 궁금해서 그런 건데……. 죄송합니다.
레오가 냉큼 사과하니 화를 낼 의욕이 꺾였다.
게다가 지금은 레오를 다그치는 것보다 페르데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니, 이 부분은 잠시 접어 두었다.
“그래서, 페르데스 님이 뭔가 눈치챈 것 같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사라지셨을 리가 없으니까요.
전자는 로고스 경이 후자는 레오가 말한 거였다.
“사라지셨다고?”
-네. 몽튜를 앞두고 잠시 쉬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하.”
페르데스가 뭔가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기까지 했단 말이지.
거기다 숨기려고 했던 페르데스나 로고스 경의 정체가 서로에게 탄로가 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것 참, 산 넘어 산이네.
한 가지만 일어나도 골치가 아픈데, 연달아 일어나니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페르데스 님은 무사하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 각하.
내가 말이 없자 걱정한다고 생각했는지, 레오가 날 위로했다.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닌데.
“페르데스 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전혀 찾지 못했나?”
-네. 주변을 계속 수색하고 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사라졌다는 걸 안 건 언제지?”
-4시간 전입니다.
4시간이면 이미 다른 곳에 가고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것일 수도 있으니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그건 레오에게 맡기고 로고스 경은 예정대로 움직이도록.”
이미 4시간이나 썼는데, 더 시간을 소모한다면 다른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로고스 경은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레오는 당황하며 내게 말했다.
-정말로 제게 맡기시는 겁니까? 저 혼자 페르데스 님을 찾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아니. 난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헤헤.
뭐지, 이 바보 같은 웃음소리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레오?”
-아, 네. 저 여기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레오 여기 있어요.
“…….”
-하아.
주접스러운 레오의 행동에 나는 할 말을 잃어 가만히 있었고, 로고스 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런 남자를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이런 남자라니! 제가 뭐 어때서 그러십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싸우는 건 통신을 끊고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곧 나가야 하기도 하고, 언제 시녀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마음 편히 통신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레오는 페르데스 님을 찾는 즉시 내게 연락해.”
-네, 각하.
통신은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흘겨본 뒤, 목걸이 형식으로 걸고 있던 반지를 꺼냈다.
페르데스와 주고받은 통신 반지였다.
로고스 경과의 대화를 듣고 사라졌다면 내 연락도 받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모르니 통신을 걸었다.
“역시 안 받네.”
혹시나 했는데, 예상했던 결과였다.
페르데스가 갑자기 왜 사라졌는지도 얼추 짐작됐다.
“날 막고 싶은 거겠지.”
페르데스라면 로고스 경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더라도, 내가 코스모스 상단을 노예 상단으로 위장시켜 노예들을 대거 제국에 들인 이유를 눈치챘을 테니까.
“날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이 이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테니까.
똑똑-
“각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나가지.”
* * *
혼자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호위 기사가 붙었다.
말이 호위 기사지, 황제의 명령을 받은 감시역이 분명했다.
그 말인즉, 아나토메 친위대 소속 기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
황제의 충견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짜증 났지만, 황제가 붙여 줬으니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마티나 백작저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백작저에 도착하니 노집사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나는 쓱, 홀을 훑어본 뒤 집사에게 물었다.
“마티나 백작은 어디 있지?”
“손님이 오셔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다. 각하께서 오시면 바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으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렴.”
나는 충견들을 두고, 노집사를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레오폴드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주인님.”
“…….”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노집사는 마치 들은 것처럼 말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고.
마티나 백작의 집무실은 넓고 깨끗했으며, 조용했다.
나 말고 아무도 없으니 조용한 게 당연하지.
노집사는 마티나 백작이 저택에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마티나 백작은 현재 니콜 테시스 소유의 창고에서 나 대신 호스트 노릇을 하며 북부 귀족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이곳에 온 건, 홀에서 대기하는 충견들처럼 날 감시하는 눈을 떼어 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깥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바로 맞은편에 있는 나무로 뛰어 넘어갔다.
저택의 높은 담벼락도 가뿐하게 넘어 백작저를 몰래 빠져나온 나는 마티나 백작을 비롯한 북부 귀족들이 기다리는 창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