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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화 (205/262)

211화

어셔 안드리아.

두 번째 생에서 나와 알도르 경을 죽인 아나토메 친위대 일원.

지독한 악연인 만큼 두 번 다신 그와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이렇게 만나니 반가웠다.

이런 상황에선 내가 그를 때려죽인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 죽이는 것까지는 안 되려나.

하여간 내가 당한 걸 조금이나마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몹시 기뻤다.

잘하면 황제까지 연관시킬 수도 있었고.

일단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몇 대 때리고 시작해야겠어.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힘껏 어셔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하는 과격한 타격음과 함께 어셔의 얼굴이 완전히 돌아갔다.

곧바로 반격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볼까.

나는 그의 입술이 완전히 터져 피범벅이 될 정도로 후려쳤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았다.

“재미있네.”

그의 얼굴을 휘어잡고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설마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서 가만히 있는 거라고 하진 않겠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입술이 터진 탓인지 발음이 줄줄 샜다.

그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바보같이 말했다.

“저는 그저…… 부단장님의 보좌관 집무실에 외부인인 공작 각하께서 혼자 계시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 말은 개소리였고.

“그런 거였다면 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왔어야지, 왜 창문 근처에 얼쩡거리고 있었지?”

“…….”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어셔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외부인이지?”

그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는 4황자 전하의 약혼자이자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가주이자 공작이다. 레오폴드 공작들이 대대로 황실 기사 단장직을 맡았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

뭐야.

방금…… 웃었어?

“지금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닙니다.”

어셔가 뜬금없는 그의 반응에 잠시 벙쪄 있는 내게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찬란한 영광은 이제 지나갔……!”

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잇따라 복부를 걷어차자, 어셔는 더는 버티고 서 있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시 말해 봐.”

나는 그의 다리뼈를 부술 것처럼 세게 밟으며 멱살을 잡았다.

“다시 지껄여 보라고 했다.”

“쿨럭-.”

“공작가의 영광이 뭐 어쨌다는 거지? 응?”

한 번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그 입을 찢어 주려고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어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감히 공작을 염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다니. 정말 죽고 싶은 게로구나.”

“…….”

“그래.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이렇게 죽이는 게 아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와 알도르 경이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살아 있는 게 후회가 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한 뒤에 죽여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

그를 당장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손이 움직였다.

그대로 그의 목을 졸라 죽이려는데.

“그만 하세요, 공작.”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감히 누가 날 방해한단 말인가.

나는 인상을 팍, 쓰며 돌아봤다.

“……황자 전하.”

3황자, 이안이었다.

그는 내 양팔을 낚아채듯이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황궁에서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하는 건 금지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도 참으세요, 공작.”

“……무분별한 폭력은 아니지요. 이 자는 공작인 저를 무시하고 능멸했으니까요.”

“공작.”

3황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말릴 생각인가 보네.

내가 직위로 어셔를 눌렀듯이 3황자 역시 직위로 날 누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어셔를 찍어 누른 것처럼 완전히 강압적으로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버티면 손해인 건 나인지라, 속으로 혀를 차며 어셔의 다리에서 발을 뗐다.

불행히도 뼈가 부러진 건 아닌지 어셔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3황자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으니, 어서 가서 치료를 받거라.”

“황공합니다.”

어셔는 3황자에게 다시 인사한 뒤, 내게도 인사하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눈엣가시 같은 놈을 없앨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네.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데, 3황자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걸로 닦으세요.”

나는 손수건을 받는 대신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황자 전하께선 병 주고 약 주는 걸 잘하시는군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공작을 지키려고 했던 겁니다.”

“황자 전하께서 저를 지키신다고요?”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자, 3황자가 입술을 꾹 깨물며 주변을 쓱 훑어봤다.

그러고 보니 슬슬 보좌관이 돌아올 시간인데.

내가 열린 창문을 쳐다보자 3황자가 말했다.

“보좌관이라면 진작 도망갔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길 바랐는데, 이미 도망친 건가.

여기서 본 걸 쓸데없이 이곳저곳에 옮기고 다닐까 봐 걱정이네.

“입단속은 시켰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작.”

“…….”

3황자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계속 대답하자,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봤다.

반면 3황자는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과격해졌군요, 공작.”

“그러는 황자 전하께선 못 본 사이에 능글맞아지셨습니다. 아, 이제 후작 각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3황자는 후작가의 영애와 결혼해서 후작위를 승계받았다.

그러니 작위만 보면 후작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신분이 나보다 높으니 그냥 후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보통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는 신분을 호칭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부로 비꼬듯이 물었다.

그러자 3황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황자 전하라고 불러도 됩니다. 이안 님도 좋고요. 저도 그럼 공작을 아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지.

“감히 이름을 부를 만큼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걸로 압니다만.”

“한때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던 사이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아쉽군요.”

아쉽기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도 그때의 정을 생각해서 말하는데, 저 기사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건드려 봤자 공작에게 피해만 갈 테니까요.”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왜죠? 아, 혹시 저 기사가 황제 폐하의 충견이라서 그런 건가요?”

충견.

아나토메 친위대 일원을 속된 말로 부르는 표현이었다.

3황자도 바로 알아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습니까?”

나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3황자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짓을 했다니……. 못 본 사이에 과격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담해졌군요. 겁도 없어졌고.”

“그가 저를 무시하길래 조금 혼을 내 줬을 뿐입니다. 그게 과격하고 겁이 없는 짓인 줄은 몰랐군요.”

“상대에 따라서 다르지요.”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인 3황자가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황제의 충견들을 건드려서 무사한 귀족은 없습니다.”

“그럼 제가 첫 번째로 무사한 귀족이 되겠군요.”

별 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하자 3황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 겁니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기사가 황제의 충견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한 것도 그렇고, 지금 말하는 것도 그렇고……. 마치 부황 폐하께 반항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고작 반항하는 사람인가.

웃음이 나왔다.

“제 말이 웃긴 모양이군요.”

“우습긴 했습니다.”

“공작.”

“저는 황제 폐하께 반항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보다 더한 짓을 할 생각이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3황자가 비로소 안심한 듯 웃었다.

“이 땅에 사는 생물 중에 태양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태양을 피해 살아갈 수 있는 생물도 없고요.”

“…….” 

“그러니 괜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공작을 위해서라도 좋을 겁니다.”

“그래서 전하께선 태양에 굴복했나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약간 욱하는 마음에 나온 말이기도 하고.

3황자가 황제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열린 창문을 쳐다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달리 유감없이 드러낸 존재감.

보좌관이겠지.

“저기…….”

예상했던 대로 보좌관이었다.

그는 나와 3황자를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 대화가 끝나셨습니까?”

“그래.”

나는 대답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20분.

슬슬 준비하지 않으면 약속에 늦겠어.

“그럼 전 약속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황자 전하.”

3황자는 묘한 눈으로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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