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내가 황후 궁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가 다급하게 출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후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센 공작을 만나러 간 거겠지.
먹으라고 던져 준 것이긴 하지만, 체면도 집어던지고 낼름 삼킬 줄은 몰랐다.
적어도 내가 준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은 할 줄 알았는데.
그만큼 황후가 체르노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
“의외네.”
체르노서를 골칫덩어리 취급하며 구박하길래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사고뭉치라도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싫어할 리가 없지.
덕분에 나를 귀찮게 하는 루센 공작을 막을 체스 말이 생겼으니, 내 입장에선 이득이었다.
그렇게 황후와 루센 공작 쪽은 일단락됐지만, 날 귀찮게 하는 존재들은 아직 잔뜩 남아 있었다.
가령 황제와 점심 만찬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아내고자 벌떼처럼 달려드는 귀족들이라던가.
레오폴드 공작저의 지하실에 있는 검이 탐이 나서 계속 치근덕거리는 황제라던가.
후자는 예상했던 일이고, 황제에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걸 충분히 어필해 둔 터라 괜찮았다.
상대해야 할 사람도 황제 하나뿐이었고.
하지만 전자는 아니었다.
상대해야 하는 귀족의 수가 워낙 많은 데다가.
한꺼번에 같이 오는 게 아닌 시간별로 나눠서 찾아와 짹짹거리니, 몹시 귀찮고 짜증이 났다.
당신들이 바라는, 어째서 황태자에게 정치와 관련된 일들을 황태자에게 일임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어째서 듣지 못했는지, 그럼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황제가 아프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지 등등 이것저것 캐물으며 계속 날 귀찮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머무는 곳이 본디 황족들만 머물 수 있는 내궁인지라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지는 못하고 궁정인들을 통해 찌르는 게 전부라는 거였다.
“역시 황궁에 머물기를 잘했다니까.”
내가 황궁에 머무는 걸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람의 앞날은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물론 이것 때문에 황궁에서 머무는 건 아니었다.
이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계획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걸 위해 나는 산책한다는 핑계로 황궁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확인했다.
황궁 구조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되짚는 형식인지라, 하루면 충분했다.
“오늘은 황궁 기사단에 가 봐야겠다.”
알아볼 게 있으니까.
게다가 저녁에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몸도 풀 겸 그게 좋을 것 같아, 검술 훈련을 하고 싶다는 이유를 대고 기사단으로 향했다.
카캉-
기사단 입구에 들어섰을 때부터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훈련장에서 상의를 벗은 황궁 기사들이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어머.”
내 시중을 든다는 이유로 따라온 시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눈을 가렸다.
“고작 상의만 안 입은 건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가, 각하는 괜찮으세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이런 장면을 자주 보기도 했고, 고작 웃통을 깐 것에 부끄러워할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더니, 시녀는 내가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양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날 바라봤다.
하하, 정말이지…….
“힘들겠네. 너도.”
황제 때문에 내 마음에 들려고, 없는 소리를 하려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어리둥절하는 시녀를 내버려두고, 훈련장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사들은 하던 훈련도 멈추고, 내 쪽을 힐끗 쳐다봤다.
누군가 어딘가로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진열대에 있는 목검을 꺼내 들었다.
“좋은 목검이네.”
관리도 잘 되어 있고.
목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몸을 푸는데, 아까 어딘가로 뛰어갔던 기사가 안면이 익은 남자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오랜만이네, 도미닉 경.”
안면이 익은 남자는 바로 도미닉 자하로프였다.
과거, 체르노서가 실종되고, 그를 죽인 용의자인 호위 기사의 신병을 인도받으러 레오폴드 공작가에 직접 왔던 남자.
“공작 각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최근 이래저래 일이 많아 검을 잡지 않았더니, 몸이 찌뿌둥해서 풀고 싶어서 왔는데. 혹시 실례일까?”
“그건 아닙니다만, 오늘은 신입 기사들의 훈련이 있는 날인지라, 이곳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앳되어 보이는 기사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신입이었구나.
“안쪽에 다른 훈련장이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훈련장?”
“네. 1급 이상 되는 황궁 기사들이 쓰는 훈련장입니다.”
황궁 기사들은 실력에 따라 급을 나눴는데, 가장 높은 등급이 로얄 기사, 그 다음이 1급 기사였다.
“나는 1급 기사도, 로얄 기사도 아닌데 그곳을 써도 될까?”
“물론입니다. 공작 각하께선 특별하신 분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하하, 아닙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가 도미닉 경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녀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여기서부터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출입 제한을 당한 시녀는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저는 공작 각하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도 예외는 없다.”
도미닉 경이 단호하면서도 엄격하게 말했다.
“공작 각하라면 나와 이곳의 기사들이 잘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첫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만큼 그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오늘로써 조금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런……!”
시녀가 발을 동동 굴리며 어떻게 해 달라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게 규칙이라니, 어쩔 수 없지.”
“하오나……!”
“괜찮아. 간단하게 몸만 풀고 나올 거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렴.”
내 말에도 시녀는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히 곤란하겠지.
황제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테니까.
“혹시 나를 반드시 따라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묻자, 시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각하.”
“그래. 내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 꼭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래야 황제한테 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시녀를 두고 기사단 안쪽으로 들어가자 고요한 정적이 몸을 휘감았다.
“선임 기사들도 신입 기사들을 훈련시키느라 대부분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편하게 몸을 푸시면 됩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도미닉 경.”
“하하, 아닙니다. 그럼 저도 신입 기사 훈련 때문에 밖에 가 봐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저 건물에 제 보좌관이 있으니 그한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그의 집무실은 1층, 보라색 문입니다.”
나는 도미닉 경이 가리킨 건물을 쳐다봤다.
저 건물에 내가 원하는 게 있단 말이지.
“알았네.”
“그럼 이만.”
도미닉 경이 떠나고, 나는 목검을 휘두르며 적당히 몸을 풀었다.
그런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끗 쳐다봤다.
“부담스러워서 훈련을 못 하겠네.”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그런 척 연기를 하며 도미닉 경의 보좌관이 있다는 건물로 들어갔다.
1층, 보라색 문이라고 했지.
“레오폴드 공작 각하?”
안으로 들어가자 업무를 보고 있던 보좌관이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이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도미닉 경이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 와서 말하면 된다길래.”
“아, 그러시군요.”
도미닉 경에게 들은 바가 전혀 없는지, 보좌관은 다소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다 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네. 얼음을 띄운 걸로.”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져오는 김에 샌드위치 같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도 부탁해.”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나가고, 나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보좌관이 돌아오기 전에 찾아야 하니, 다급하게 서류를 뒤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기척을 죽일 수 있는 걸 봐서 상대는 최소 1급 기사였다.
‘누군지 몰라도 평범한 기사는 아니군.’
평범한 기사가 창밖에서 안을 훔쳐보려고 할 리가 없으니까.
나 역시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러면 갑자기 기척이 없어진 것에 당황한 상대가 창문을 열 테니, 그때 제압해야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되짚고 있는데, 예상했던 대로 창문이 열렸다.
지금이다.
나는 창문 너머로 뻗은 상대방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비틀었다.
“……!”
깜짝 놀란 상대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아 보통 인간보다 강한 내 힘을 이기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자꾸 버둥거리니까 짜증 나긴 하네.
확실히 제압할 생각으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나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고 웃었다.
“오랜만이네, 어셔 안드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