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3/262)

209화

‘이상해.’

한두 명이 억양이 비슷했다면 고향이 같구나, 하고 넘겼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억양을 사용하는 건 상당히 이상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예 상단은 보통 노예를 물건 취급하며 막 다루는데, 여기는 밥도 잘 주고 잠자리도 챙겨 주었다.

상단 직원들도 노예들에게 친절했고.

“제가 모르는 사이에 노예 대우가 상당히 좋아진 모양이군요.”

역시 뭔가 있다고 판단한 페르데스는 정보를 캐기 위해 상단에 고용된 용병 중, 플랭키 로이드와 같은 억양을 쓰지 않는 자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용병이 픽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그럴 리가. 이 상단이 특별한 거야. 내가 노예 상단 호위를 여러 번 맡아 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라고.”

“역시 그렇죠?”

“그래. 뭐, 아르티나 왕국 출신 사람들이 다른 왕국보다 노예에 관대하긴 하지만, 저 정도까진 아니야.”

“지금…… 상단 사람들이 아르티나 왕국 출신이라고 했습니까?”

“어라, 몰랐어?”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구나. 하긴 넌 여기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언뜻 들으면 티가 전혀 나지 않으니 모를 만하지.”

“노예들도 여기 상단장과 같은 억양을 쓰는 것 같던데……. 혹시 전부 아르티나 왕국에서 데리고 온 사람입니까?”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렇군요.”

더 자세히 알아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이 정도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나저나 저들의 출신이 하필 아르티나 왕국이라니.

그곳은 아델이 손을 잡은 프로페테스 4세가 있는 왕국이었다.

즉, 이번 일에 프로페테스 4세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

“……그 자식에게 물어봐야겠어.”

레오. 그는 아델에게 직접 지시를 받았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아델에게 직접 묻는 게 가장 확실하고 빨랐으나, 그녀가 알려 줄 리가 없었다.

당분간 제국에 돌아오지 말라는 그녀의 부탁을 어긴 걸 숨겨야 하니 더더욱 아델에겐 연락할 수가 없었다.

용병과 헤어진 페르데스는 레오를 찾아갔다.

그러나 레오는 자리에 없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 바, 물을 뜨러 호수에 갔다고 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레오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곧바로 레오가 있는 호수 쪽으로 걸어가던 페르데스는 커다란 나무 아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하하, 그것 참 신기하군.”

그중 한 명은 플랭키 로이드였다.

그를 발견한 페르데스는 저도 모르게 나무 뒤로 숨었다.

“하하, 그래?”

“제가 그래서 말이죠…….”

그들은 페르데스가 온 줄 모르고 정겹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잠깐만. 저 사람들은 노예잖아.’

페르데스는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봤지만, 확실했다. 

페르데스는 저 사람들이 쇠고랑을 차고, 반쯤 헐벗은 상태로 철장에 갇혀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아무리 노예에게 관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노예와 저리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이상했다.

철장에 갇혀 있어야 할 노예들이 상단 직원인 척 멀쩡한 상태로 있는 것도 이상했고.

“그럼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 거지?”

“어떻게 부르긴. 평소대로 부르면 되지.”

“에이. 어떻게 그래요.”

“맞아요. 그러면 단장님의 체면이 안 살잖아요.”

게다가 사람들이 플랭키 로이드를 단장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상단주라서는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플랭키 로이드는 코스모스 상단의 상단주가 아니었고.

“요즘 훈련을 못 했더니, 조금 몸이 찌뿌둥하네요.”

“조금만 참아. 레논만 지나면 더는 용병들이 필요 없으니, 그들을 보내고 실컷 시켜 주지.”

“으음, 단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데요.”

“이놈이. 넌 특별히 연무장을 스무 바퀴 돌려야겠군.”

훈련과 단장, 그리고 연무장까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검술이 떠올랐다.

게다가 지금 노예들의 모습은 알도르가 훈련하자고 했을 때, 투정 부리는 레오폴드 기사들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다.

즉, 저 노예들이 사실은 기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

‘설마 했는데, 진짜 노예가 아니었군.’

하긴 아델이 뜬금없이 코스모스 상단을 노예 상단으로 위장시켜 노예들을 대거 사들였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르티나 왕국의 기사들을 노예로 위장시켜서 제국에 들이다니.

아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설마…… 전쟁인가.”

가지를 뻗어 나간 생각이 내린 결론에 페르데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쟁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해서 막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델이라면 가능했다.

아니, 그녀가 하려는 건 전쟁이 확실했다.

전쟁만큼이나 제국의 이름을 대륙의 지도에서 지우는 확실한 방법은 없으니까.

‘프로페테스 4세와 손을 잡았다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아델이 이런 엄청난 계획을 실행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쥐새끼가 있는 것 같군.”

“!”

플랭크 로이드가 제 쪽으로 다가오자 당황한 페르데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그때.

“……!”

수풀 안쪽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인지라, 페르데스는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그렇게 페르데스가 수풀 안쪽으로 사라진 직후.

“…….”

페르데스가 있던 자리에 선 플랭키 로이드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뒤따라온 사람들도 주변을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습니다만.”

“도망치는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수색해 볼까요?”

쏟아지는 질문에 플랭키 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을 쓱, 훑었다.

약간 파인 흙바닥에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플랭키 로이드 아니, 로고스는 발자국의 모양을 눈에 확실히 새겨 넣은 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지금 당장 캠프로 돌아가서 이 발자국의 주인을 찾도록 하지.”

* * *

로고스와 그 일행이 떠난 뒤.

그들의 바로 뒤에 있던 수풀이 흔들리며, 그 속에서 페르데스와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나 덕분에 산 줄 알아.”

소년의 정체는 바로 비블로스였다.

“내가 마침 널 만나러 오지 않았으면, 넌 꼼짝없이 저놈들에게 잡혔을 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페르데스가 순순히 감사의 인사를 했는데도,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비블로스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왜 저놈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었던 거지? 같은 편인 거 아니었나?”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적이야?”

“그것도 아닙니다.”

“뭐야, 그게.”

그러게요. 무슨 사이인 걸까요.

그것 말고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자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벌집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지금 뭘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델이 전쟁을 일으키는 걸 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그 남자보다 먼저 아델을 만나야 하는데.’

정상적인 루트로는 절대 그 남자보다 먼저 아델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름길을 이용하거나, 편법을 써야 했다.

가령 마법이라던가. 

그도 아니면…….

허공을 짚던 황금색 눈동자가 비블로스에게 꽂혔다.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한 낌새를 느낀 비블로스가 움찔하며 닭살이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건데?”

“……대현자님. 여기서 수도까지 날아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부디 대답해 주십시오.”

정중한 것 같으면서도 다소 강압적인 말에 비블로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글쎄. 한 번도 안 해 봤지만, 반나절이면 충분할걸.”

기차를 타면 사흘은 걸리는데, 반나절 만에 갈 수 있다니.

페르데스의 눈이 반짝거리자, 비블로스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나한테 수도까지 날아서 데려다 달라고 할 거잖아.”

정답이었다. 페르데스가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자, 비블로스가 인상을 팍 썼다.

“난 교통수단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부탁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용했겠죠.”

“이 자식이 말하는 거 하고는…….”

“전 반드시 그 남자보다 먼저 아델을 만나야 합니다.”

페르데스가 비블로스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현자님.”

비블로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페르데스의 머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헤집었다.

“좋아. 네 부탁을 들어주지.”

“감사……”

“단.”

비블로스의 눈동자가 도마뱀처럼 다이아몬드 형태로 변했다.

그는 푸른 비늘이 돋아난 뺨에 섬뜩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 거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