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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202/262)

208화

황태자와 헤어진 뒤, 곧바로 황후의 궁을 찾아갔다.

“어서 오세요, 레오폴드 공작.”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랄 법도 하건만, 황후는 그런 기색 없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연기나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보아하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네.

그게 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 목적을 이루는 데만 초점을 두고 말했다.

“공작령의 빠른 복구를 위해 수도의 공작저 사용인들을 전부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보내게 됐습니다. 하여 당분간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 황궁에 머물고 싶은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런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 필요할 때마다 부담 없이 부탁해도 돼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공작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기브 앤 테이크라는 건가.

“부탁하실 게 무엇인가요?”

“4황자와 파혼하세요.”

“…….”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지.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많이 당황한 모양이네요. 이해해요. 갑자기 이런 부탁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죠.”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황후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작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요. 아니, 오히려 공작의 입장에선 굉장히 좋은 제안이죠. 어차피 공작도 4황자와 결혼하기 싫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도 꽉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서 묻자, 황후가 긴 속눈썹을 가볍게 팔랑이며 되물었다.

“아닌가요?”

“아닙니다.”

“나는 공작이 4황자와 결혼하기 싫어서 온갖 핑계를 대며 결혼식을 미룬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닌가요?”

갑자기 왜 저런 생각을 하는 건지 의아했는데, 저것 때문이었군.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자의로 결혼식을 미룬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매번 사건이 터져서 어쩔 수 없이 미룬 거죠.”

“그렇죠. 처음에는 4황자가 어려서 결혼을 할 수가 없었고, 4황자가 성인이 된 뒤에는 체르노서가…….”

황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뒤에는 위조 금화 사건이 터져서 결혼식이 무기한 연기됐죠. 경제가 크게 흔들리며 물가가 치솟아 제국민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사치스러운 결혼식을 하면 제국민들의 불만이 폭주할 테니까요.”

“그렇죠. 그러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그래요.”

짧은 감탄사에는 ‘믿기지 않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일단 믿는 척한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공작이 4황자와 파혼했으면 해요.”

“…….”

“혹 황족에게 파혼을 통보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인지라 걱정하는 거라면 내가 해결해 줄게요.”

뭘 어떻게 해결해 주려는 건지 궁금하면서도 묻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더러운 수를 쓸 게 뻔했으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4황자와 파혼해 주세요, 공작.”

“왜 그렇게까지 제가 4황자 전하와 파혼하길 바라시는 건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면요?”

“그럼 거절하겠습니다.”

황후가 어떤 이유를 말해도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황후가 놀랍다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공작이 이리도 단호하게 내 부탁을 거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무사히 파혼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까지 했는데…….”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절 이용하시려는 거겠죠.”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저는 황후 폐하의 체스 말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체스 말을 알아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말하면 부탁을 들어줄 건가요?”

“글쎄요. 어떤 이유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끝까지 확답은 주지 않는군요.”

황후가 조금 야속하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황후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물론 페르데스와 결혼할 마음이 없으니 언젠가 그와 파혼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좋아요.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말하죠.”

황후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심호흡하더니,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선 공작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고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모종의 계획? 

“나는 그 계획을 막고 싶어 공작에게 4황자와 파혼할 것을 부탁한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세운 모종의 계획이 뭐죠?”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레오폴드 공작과, 아니, 정확히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지하실에 숨겨져 있는 어떤 물건과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황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황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제 아들의 목숨까지 바쳐 그 물건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죠.”

황제 폐하가 아니라 황제인가.

하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자가 친부라는 걸 알아 버렸으니, 더는 존칭을 쓸 수 없겠지.

지금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레오폴드 공작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침묵하겠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설령 공작이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더라도 4황자와 파혼만 해주면 되니까.”

황후가 핏발이 선 눈을 휘며 섬뜩하게 웃었다. 

“황제가 황자와 공작을 결혼시키려고 안달복달한 건, 그 황자를 레오폴드 공작으로 만들어 공작저의 지하실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오려는 거예요. 공작가의 지하실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레오폴드 공작뿐이니까.”

조금 틀리긴 했지만, 정답에 거의 근접했다.

설마 황후가 여기까지 알아냈을 줄이야.

그만큼 집요하게 황제의 뒤를 팠다는 건데, 그런데도 지금까지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러니 당장 4황자와 파혼하세요. 그게 공작을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화가 났는지 황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똑똑-

“황후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시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황후가 곱게 칠한 입술을 사정없이 짓뭉개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니, 들어오지 말거라.”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내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겁니까?”

“이해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그런데 어째서 거절하는 거죠? 설마 정말로 4황자를 좋아하게 된 건가요?”

좋아한다는 단어가 이상하게 귀에 박혔다. 

“그는 멍청한 백치니까, 이용하고 버리려다 진심으로 마음을 주게 된 겁니까?”

아직도 페르데스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긴 한 번 뿌리박힌 이미지를 탈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대답해보세요, 공작. 정말로 그런 겁니까?”

“그렇다고 해 두죠.”

내가 무심하게 대답하며 일어서자 황후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날 노려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 어차피 황제 폐하께선 원하시는 걸 이루지 못하실 테니까요.”

“……공작이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그 부분은 비밀입니다.”

황후가 눈썹을 찡그리며 노려봤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좋은 걸 알려 드리죠.”

당신이 날 체스 말로 쓰려고 했다면, 나 역시 당신을 체스 말로 쓰겠어.

안 그래도 골칫덩어리 때문에 짜증 났는데, 이로써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루센 공작이 2황자 전하께서 쓴 새로운 쪽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2황자 전하께서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정황과 함께 말이죠.”

“……!”

“그러니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시간에 루센 공작에게 연락해 보는 게 어떠신가요?”

* * *

레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페르데스는 비블로스에게 뭘 봤는지, 특별한 게 있는지 물어봤다.

“딱히 특별한 건 없었어. 그냥 평범한 노예 상단이던데.”

“그래요?”

“응. 그나저나 너희 인간들은 아직도 같은 종족을 사고파는 건가? 하여간 하등한 종족이군.”

비블로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순식간에 하등한 종족이 된 페르데스는 약간 화가 났지만, 맞는 말인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데스는 레오의 도움을 받아 코스모스 상단의 호위 용병으로 합류했다.

반면 비블로스는 용병 자격증이 없어 용병으로 합류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비블로스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난 알아서 할 테니까, 너나 신경 써.”

하긴 그는 드래곤이니까 이 정도 검문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믿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그렇게 비블로스와도 잠시 헤어지게 된 페르데스의 신경은 온통 코스모스 상단에서 데리고 있는 노예들과 플랭키 로이드라는 남자에게 향했다.

“우리 일정은…….”

특히 플랭키 로이드의 억양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제국에서 쓰는 억양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쓰는 거지?

그의 말투를 따라 하며 곱씹어 생각하던 페르데스는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노예들도 플랭키 로이드와 같은 억양을 쓴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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