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레오폴드 공작가의 지하실에는 오로지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낚기 위해선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야 하는 법.
“그곳에서 아버지와 선대 레오폴드 공작들의 일지를 발견했습니다.”
“호오, 그래? 그 일지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지?”
“워낙 양이 많아서 전부 다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역대 제국이나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 둔 것 같았습니다.”
“선대 레오폴드 공작의 입장에서 적은 제국의 과거 모습이라. 그것 참. 흥미롭군요.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황제의 반응을 보고 싶은데, 짜증 나게 왜 자꾸 황태자가 끼어드는 건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도, 겉으론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일지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일지들은 공작가의 중요한 유산일 텐데, 가지고 왔다가 혹여 훼손되거나 분실되면 큰일이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황제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의 말에 그러지 말라거나, 다른 의견을 내놓지도 않았고.
아무래도 황제가 노리는 건 일지나 그와 비슷한 기록물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저주니 뭐니, 이상한 말만 잔뜩 적혀 있는 일지를 보려고 안달복달할 이유는 없지.
그럼 뭘까. 혹시 그 검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게 숨어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혹시 체르노서의 목숨과 맞바꿔서 손에 넣은 건가?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하실에서 이상한 물건을 찾았습니다. 아니, 조금 신기한 물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고 슬쩍 운을 띄우자, 물컵을 집던 황제의 손이 멈칫했다.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굴러 내게로 향했다.
“신기한 물건?”
다행히 아직 손에 넣은 건 아닌 모양이네.
“네.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 전하께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을 상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내 요구에 황태자는 깜짝 놀라며 황제를 쳐다봤고, 황제는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지? 공작은 물론 황태자의 가슴에도 상처만 남을 이야기일 텐데.”
“제가 지하실에서 발견했다는 이상하고 신기한 물건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자세한 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내가 고개 숙여 부탁하자, 황제는 난감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지.”
이번에는 황태자의 표정이 무너졌다.
“어서 말해라, 황태자.”
“그게,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많이 흐려졌지만…….”
하지만 황제가 뜻을 바꾸지 않으니 황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더듬더듬 말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은, 새로울 게 전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물어본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마침내 긴 이야기가 끝나자, 황태자가 내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작. 제가 그때 좀 더 주의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황태자 전하께 사과를 받고자 그때 일을 물어본 게 아니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과해도 받아 줄 생각이 없기도 하고.
“그런데 정말로 아버지께서 평소 쓰시던 검이 부러진 게 맞나요? 다른 검을 쓰셨는데, 그 검을 쓰셨다고 착각한 건 아니신가요?”
“절대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그야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평소 사용하던 검에는 지금은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큼지막한 퓨라가 박혀 있었으니까요. 착각하려고 해도 절대 착각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이야기가 나왔네.
“그렇죠. 아버지께서 쓰시던 검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검이었죠.”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가 아닌 황제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검이 공작가의 지하실에 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황제의 표정이 변하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부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다.
“황태자, 정말로 똑바로 본 게 맞는 건가?”
“그, 그것이…….”
황태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하게 맞다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 착각한 것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거겠지.
황태자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황제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쯧 내차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공작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황태자는 이만 나가 보도록.”
황태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시종들까지 전부 물리고 내게 물었다.
“공작이 지하실에서 봤다는 검, 확실하게 리암에 평소 쓰던 검이 맞겠지?”
“제가 기억하기론 맞습니다만, 황태자 전하께서 확실히 그 검이 부러지는 걸 보셨다고 하니 제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드네요.”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라?
“리암이 쓰던 검이라면 짐도 자주 봤었으니, 그 검을 짐에게 가져다주면 직접 확인해 보겠네.”
일지 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봐서 황제가 찾는 물건은 아무래도 그 검인가 보네.
줄곧 베일에 싸여 있던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는데, 기쁘긴커녕 오히려 짜증 났다.
그딴 검 때문에 내가 그 고생을 했다는 사실이 얄팍한 인내심을 긁으며, 분노를 일으켰다.
만약 이전 생의 나였다면, 당장 그 검을 황제에게 집어 던지며 원하는 걸 가졌으니 이제 나 좀 그만 괴롭히라고 소리쳤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한테 통쾌하게 복수할 수 있는데, 그가 원하는 걸 쥐여 주며 굽히고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그럴 이유는 전혀 없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화가 점차 가라앉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연기할 수가 있었다.
“그 검은 봉인되어 있어 가지고 올 수가 없습니다.”
“봉인?”
“네. 어떤 봉인인지 알아내려고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네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바로 물어봤을 텐데…….”
슬픈 척, 억지로 눈물을 짜내며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 위로 황제가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연기는 이쯤 하고, 배우는 이제 퇴장할 시간이었다.
“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그런데, 송구하오나 먼저 일어서도 되겠습니까?”
눈물 젖은 얼굴로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누가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 오늘은 일단 여기서 그만두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뭐든 도와줄 테니.”
끝까지 검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는 걸 봐서 황제가 노리는 건 역시 그 검이 확실했다.
나는 황제에게 인사를 한 뒤, 정원을 빠져나왔다.
“아참, 황궁에서 머무는 거 허락받아야 하는데.”
다시 돌아가는 건 싫은데, 어떡한다.
“어쩔 수 없지.”
황후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황후의 궁 쪽으로 가려는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공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또 3황비인가 싶었는데, 이번엔 황태자였다.
“말씀하세요.”
보나 마나 아까 일부러 자신을 엿 먹이려고 그랬냐고 물어보려는 거겠지.
“페르데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그런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전혀 생뚱맞은 질문이 돌아온 데다가 페르데스와 관련된 질문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아닌 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페르데스 님이라면 사업차 테시스 영지로 떠나셨습니다.”
“정말로 테시스 영지로 간 게 맞습니까?”
없다는 걸 확신하는 질문.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는 거죠?”
“위조 금화 사건을 조사하느라 조사관이 테시스 영지에 갔는데, 페르데스를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어라, 그것 참 이상하네요.”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힘들게 숨길 필요는 없었다.
“분명 테시스 영지로 가신다고 하셨는데. 그새 다른 곳으로 가신 걸까요?”
“정말로 페르데스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까? 그의 약혼녀인데도?”
“그럼 황태자 전하께선 황태자비 전하께서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알고 계시나요?”
“그건…….”
역시 모르는지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황태자 역시 정략결혼인지라 서로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황태자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저 입을 봉인해 버려야지.
“아까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 그건……!”
“아버지의 은혜를 평생 가슴에 새기겠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어떻게 그때의 일을 잊으실 수가 있으세요?”
“지, 진짜 잊었다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물어보니 당황해서 실수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물론 실수라도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지만…….”
황태자는 허둥지둥 변명하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크흠. 난 바빠서 이만 가볼 테니 페르데스가 돌아오면 황궁에 들리라고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