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0/262)

206화

“…….”

“…….”

나와 그 사이엔 어색하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알도르 경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의 목 언저리를 쳐다봤다.

그날 이후, 알도르 경과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알도르 경이 내게 말을 걸려고 하면, 무시하며 일부러 피했다.

내 호위를 해야 하니 공작령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게 분명하니까.

그가 간청이라도 하면 흔들릴 게 분명하니, 애초에 원인을 차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면 무시하고 지나가기가 애매한데.

어쩔 수 없이 인사라도 하려는데, 알도르 경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흠칫 놀라며 그를 내려다봤다.

알도르 경이 고개를 숙인 채,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 알도르. 주군의 곁을 떠나기 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구나.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동시에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그를 피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밉기도 했고.

“제 뜻을 따라 줘서 고마워요, 알도르 경.”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며 알도르 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알도르 경이 고개를 들었다.

내 모습을 비추며 일렁이는 눈동자에 의구심과 미련이 남아 있었다.

“전부 경을 위한 일이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만큼 제가 알도르 경을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믿음직스러운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죠.”

내 대답을 들은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알도르 경은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불안했다.

뭔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나 할까.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도르 경이 사고를 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야.”

그 하녀가 날 배신할 줄 몰랐던 것처럼.

이전에 회랑에서 루센 공작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알도르 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하인에게 집사가 뒷마당 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으로 가는 와중 짐 가방을 들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하녀를 발견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하녀도 날 발견하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디서 일하고 있지?”

“주방입니다.”

주방이라면 알도르 경과도 접점이 없을 테니, 딱 적당하네.

“너한테 특별한 임무를 내리지.”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말씀하세요, 주인님.”

“어려운 임무는 아니니까,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나는 하녀가 긴장을 풀 수 있게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알도르 경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어딘가로 연락하는 모습이 보이면 잘 기억해 뒀다가, 레오폴드 공작저에서 일하는 잭과 메이라는 사용인에게 알려 주렴.”

“네, 알겠습니다.”

한 명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다른 사용인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다.

난데없이 알도르 경을 감시해 달라고 하니, 다들 어리둥절하면서도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 정도면 안전장치가 충분히 됐겠지.”

한데 안심되지 않고 오히려 불안해지는 건, 날 위해 목숨을 걸어준 알도르 경을 믿지 못하고 감시를 붙인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래. 나는 여전히 알도르 경을 믿고 있어.

내가 믿지 못하는 건 나를 둘러싼 상황이었다.

* * *

점심 만찬은 황제의 궁이 아닌 정원에서 열렸다.

3황비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정원.

“어서 오게.”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날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오폴드 공작.”

곁자리에 앉은 황태자도 내게 인사했다.

“제국의 찬란한 태양과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약식으로 인사한 뒤, 시종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시중은 내 물잔을 채워 준 뒤, 소리 없이 물러났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태자한테 물었는데, 대답은 황제가 했다.

“공작과 점심 만찬 시간을 가진다고 하니, 황태자가 자기도 끼워 달라고 해서 말이지. 혹시 불편하다면 나가라고 하겠네.”

“불편한 건 아니옵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황태자가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공작을 살짝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랬다고 하니 성공했군요.”

“장난이 짓궂으시네요.”

“하하, 미안하게 됐습니다.”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보기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점심 만찬이 시작됐다.

시종들이 순서대로 가지고 오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근사하고 맛있어 보였지만, 내 눈에는 독버섯처럼 보였다.

아주 강한 독을 품고, 사람을 유혹하는 그런 독버섯.

물론 이런 자리에서 독이 나오면 황제의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안 먹을 수는 없으니 최대한 적게 먹고, 물을 많이 마셨다.

오기 전에 해독제를 먹기도 했고.

만찬 내내 대화의 주제는 현재 가장 문젯거리인 위조 금화였다.

나는 적당히 대꾸해 주며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눈 밑이 예전보다 퀭하긴 하지만, 딱히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역시 병 때문에 황태자에게 정치적인 일을 넘겨주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레오폴드 공작이 좋은 의견을 냈다고 황태자가 말하던데.”

황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묻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내 주신 의견에 숟가락을 살짝 얹었을 뿐입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잘못된 의견을 냈는데, 공작이 바르게 정정해 준 거지요.”

“허허.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 것 같아 정말 다행이군. 아주 보기 좋아.”

황제가 흡족하게 웃으며 나와 황태자를 쳐다봤다.

누가 보면 나와 약혼한 사람이 페르데스가 아닌 황태자인 줄 알겠네.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더 황당한 건, 황태자가 야릇하고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웃는다는 거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위기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최근 폐하께서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걸 털어 내기 위해 나는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하여 몹시 걱정했었는데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진심이었다.

내가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도 전에 황제가 몹쓸 병에 걸려서 죽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까.

“허허, 공작이 이리도 날 걱정해 주는 줄은 몰랐군.”

“당연히 걱정해야지요. 폐하께선 이 엘레프테리아 제국의 기둥이시니까요.”

“으음.”

황제가 침음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공작이 그리도 날 생각해 주니 사실대로 말하는데……. 사실 지금 내 몸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닐세.”

진짜 아프다고?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황궁의에게 진찰은 받으셨나요?”

“진찰은 이미 받아 봤지만 소용없어.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자연스럽게 몸이 노화한 거니까.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황제의 나이 올해 50세. 

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노화할 정도로 늙은 것도 아니었다.

뭐, 몸을 험하게 쓰거나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황제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화했다니.

다른 병이 있는데, 그걸 숨기려고 변명을 대는 걸까?

아니면 꾀병인 건가?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부황 폐하.”

황태자가 몹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황궁의가 기력을 보충해 주는 약을 지어 올리고 있으니,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그래.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니, 빨리 기력을 찾아야겠어.”

“꼭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짝짜꿍이 아주 잘 맞네.

“물론입니다, 폐하. 꼭 회복하실 겁니다.”

별로 끼고 싶지 않았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말을 붙였다.

“공작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 안 그래도 위조 금화 문제와 영지 일 때문에 골머리가 아플 텐데, 나까지 걱정을 준 것 같아 미안하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영지 일이라면 폐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거의 수습이 됐습니다.”

“아니야. 리암이 해 준 게 있는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리암 레오폴드.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약간 놀라며 황제를 바라봤다.

그러자 황제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공작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말았군. 고의는 아니었네.”

“……괜찮습니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하진 않았다.

아니, 조금 슬픈가?

나도 모르게 가슴에 사무친 것들이 흘러나오려고 하자, 나는 꾹 눌렀다.

지금은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리암은 훌륭한 기사이자 뛰어난 조력자였네. 아는 것이 많아 내게 이것저것 많은 조언을 해 주었지.”

내가 괜찮다고 하니, 황제는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조금 불편했지만,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만약 리암이 살아 있었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이것저것 조언을 해 줬을 텐데…….”

내가 아버지보다 부족하다는 걸 지적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아쉽군. 아쉬워.”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걸 발판 삼아 황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떠볼 수 있겠어.

안 그래도 어떻게 기회를 잡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나는 옅게 웃으며 황제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그럼 공작저의 지하실에 보관된 아버지의 일지라도 보시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