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위조 금화를 제작해서 제국에 유포한 범인이 연합국이라고 생각한 제국은 검문을 강화하고, 상단이나 외교 목적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외국인의 입국을 전부 금지했다.
때문에 페르데스와 비블로스는 국경 지대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아델에게 검문이 강화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큰일 났네.”
페르데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짚었다.
맞은편에 앉은 비블로스가 식당 직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보아하니 그 신분으로는 절대 국경을 통과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냥 정체를 밝히는 게 어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정체를 밝힌다면 알려진 것과 달리 타국에 다녀온 사실을 들키게 될 테니까. 무조건 숨겨야 했다.
“그럼 어떻게 국경 검문소를 통과할 건데?”
“글쎄요.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봐야죠.”
“얼른 약혼녀에게 가 봐야 한다는 놈이 가장 빠른 길을 두고 돌아가려고 하네.”
비블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일단 여관부터 잡아. 이러다 잘못하면 노숙하게 생겼어.”
현재 국경 지대는 페르데스처럼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고 머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이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잠깐 들린 이 식당도 자리가 없어서 30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무조건 오늘 안에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니, 여관은 따로 잡지 않을 겁니다.”
오늘 안에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면, 자는 시간도 줄여 가며 서둘러 달려온 이유가 없어졌다.
“오늘이라고 해 봤자 12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가능하겠어? 뾰족한 대책도 못 찾았잖아.”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페르데스가 비블로스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텔레포트 마법을 써서 단숨에 수도까지 갈 수는 없을까요?”
“하. 도대체 뭘 믿고 이러나 궁금했는데 그걸 믿는 거였군.”
“안 되는 겁니까?”
“안 된다기보다 쓸 수가 없어. 텔레포트 마법을 쓰려면 단 한 번이라도 그 장소에 가 봤어야 하거든.”
비블로스가 반쯤 비운 맥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국의 수도에 가 본 적이 없어. 뭐, 국경 마을과 그 근처에는 가 본 적이 있으니 거기까지 가는 거라면 해 줄 수 있는데.”
“그건 안 됩니다. 국경 검문소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검문이 강화됐을 테니까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검문을 받을지 모르는데, 그럴 때마다 텔레포트 마법으로 피할 수는 없을뿐더러 그건 비블로스에게도 민폐였다.
그래서 비블로스가 텔레포트 마법에 대해서 말했을 때도 되도록 부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탁했다.
비록 그 방법도 쓸 수 없게 됐지만.
“수도까지 단번에 갈 수 없다면, 검문을 통과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럼 내가 대현자인 걸 밝히는 건?”
“여기서 그걸 밝히면 바로 수도로는 갈 수 있겠네요. 그것도 황궁으로 말이죠. 그리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비스 님이 제국에 온 게 보도되겠죠.”
페르데스와 마찬가지로 비블로스 역시 신분을 숨기는 편이 좋다고 판단하여, 밖에서는 비스 님이라고 부르기로 합의를 봤다.
“그것도 4황자인 저와 함께 말이에요.”
“……그냥 안 된다고 하면 되지, 군소리가 많네.”
비블로스가 질색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쓸데없이 복잡하네. 아르티나 왕국으로 올 때도 이렇게 복잡했었어?”
“아니요. 그때는 검문이 이렇게 엄격하지 않아서, 쉽게 통과했습니다.”
“한마디로 날을 잘못 잡았다는 거군.”
비블로스는 몹시 귀찮다는 듯 혀를 차더니, 남은 맥주를 전부 들이켰다.
제 몫을 다 마시고도 부족했는지, 아직 거품도 가라앉지 않은 페르데스의 잔을 쳐다봤다.
“안 마실 거면, 나 마셔도 되냐.”
“그냥 새로 시키시죠. 시키는 김에 먹을 것도 시키고요.”
“아, 그래. 점심시간이 지나긴 했지.”
비블로스는 냉큼 직원을 불러 음식을 시킨 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드래곤도 화장실을 가는구나.
하긴 그도 생명체니까 당연히 가겠지.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이 웃겨서 혼자 웃으며 맥주를 마시는 페르데스의 뒷자리에 한 무리가 착석했다.
“어우 씨, 내가 그 새끼 때문에 창피당한 것만 생각하면……!”
“내 말이! 그런 자식들은 당장 요절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데!”
옷차림새나 입이 걸걸한 걸 봐서 용병인 것 같았다.
그것도 상당히 시끄러운 용병이네.
페르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용병들을 싫어했는데, 대부분 저들처럼 입이 거칠고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참, 그 빨간 지붕에 사는 여자 말이야. 내가 어제 그년을 침대에 눕혔는데…….”
그것도 바로 뒤에서 음담패설을 지껄이니, 몹시 짜증이 났다.
귀가 더러워지는 것 같기도 했고.
마음 같아선 자리를 옮기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빈자리가 없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아닙니다. 얼른 먹고 일어서죠, 비스 님.”
그럼 재빨리 먹고 일어서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페르데스는 최대한 음식을 먹는 데 집중하며 용병들의 음담패설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런 놈들이 하는 이야기, 들어 봤자 도움이 될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상단을 호위하기로 했다고?”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맞아. 빌어먹을 검문 강화 때문에 그냥은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지만, 상단 호위를 하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개똥도 쓸 곳이 있다고, 용병들이 마구 떠드는 말에도 도움이 되는 게 있었다.
상단 호위를 하면 가능하다.
페르데스는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기짐 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지금 당장 용병 길드로 가죠, 비스 님.”
* * *
용병 길드는 용병 등록과 용병증 발권, 일자리 알선과 계약서 검토, 각종 분쟁 해결 등, 용병들이 대체로 싫어하는 머리 쓰는 일들을 맡아서 했다.
일단 용병이 되어야 일자리를 알선받을 수 있을 테니, 페르데스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검술 실력을 보여 주고 용병증을 받았다.
“D급인가.”
검술에 소질이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2년 넘게 검술 수업을 받았으니 C급은 나올 줄 알았는데.
기대했던 만큼 실망감이 차올랐다. 페르데스가 한숨을 내쉬자 비블로스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마조사 중에는 검을 잡는 법도 모르는 얼간이가 대부분인데 이 정도면 훌륭하니 한숨 쉴 필요 없다.”
“……2년간 검술 수업을 받았는데도요?”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그것도 레오폴드 기사단의 부단장에게 직접 받았습니다.”
이어진 말에 비블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크흠, 뭐. 인간의 생은 짧으니 모든 것에 재능이 있을 수는 없지.”
“…….”
“아, 이제 일자리 알선을 받으러 갈 거지? 그건 저쪽에서 한다고 하던데.”
뻘쭘해진 비블로스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일자리 알선을 담당하는 카운터로 향했다.
페르데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비블로스를 따라갔다.
직원에게 용병증을 보여 주자, 리스트를 내밀었다.
“보고 마음에 드는 의뢰를 고르면 돼요. 물론 고른다고 다 되는 건 아니고, 면접을 보고 발탁되어야 하죠.”
“알겠습니다.”
제국의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하게 해 줄 만한 의뢰가 뭐가 있을까.
꼼꼼하게 의뢰 목록을 확인하던 페르데스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코스모스 상단]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상단 이름이 보이네.
페르데스는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지만,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보입니까?”
그래도 믿기지 않아 비블로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비블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했다.
“코스모스 상단이라고 적혀 있네.”
“……확실하죠?”
“그래. 확실하게 코스모스 상단이라고 적혀 있어.”
코스모스 상단.
아델이 퓨라를 은밀하게 빼돌리기 위해 만든 실체가 없는 유령 상단이었다.
상단 이름은 중복되게 지을 수 없으니, 아델의 상단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 상단 이름이 의뢰 리스트에 있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더 당황스러운 건 의뢰 내용이었다.
[제국의 수도까지 물자 호송.]
아무것도 없는 유령 상단이면서 도대체 뭘 호송하겠다는 거지?
그리고 지금 이 상단을 이끄는 책임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이 의뢰로 하겠습니다.”
그리 다짐한 페르데스는 용병 길드에서 써 준 의뢰 소개서를 들고, 곧장 코스모스 상단의 책임자가 있다는 여관으로 향했다.
비블로스는 떼어 놓고 싶었으나, 끝까지 따라올 거라고 버틴 탓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왔다.
페르데스는 여관에 들어가기 전, 비블로스에게 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니까.”
정말 알아들은 거 맞겠지.
페르데스는 걱정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이킬 수는 없으니, 속으로 걱정을 삼키며 여관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익숙한, 그리고 재수 없는 목소리.
“어……?”
마찬가지로 익숙하면서도 짜증 나는 얼굴.
“당신이 왜 여기 있지?”
바로 레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