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수도의 레오폴드 공작가 사용인들이 공작령으로 떠나는 건 오늘을 기점으로 사흘 뒤였다.
그때 에런 경과 알도르 경도 같이 보내고 싶은데, 뭐라고 말해야 하나.
특히 알도르 경을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지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이야기는 꺼내 볼까.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당분간 황궁에서 지낼 거라 호위가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 알도르 경을 너무 혹사 시킨 것 같아 휴가를 주고 싶은데. 어때요?”
“괜찮습니다.”
알도르 경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참. 예상했던 결과이지만, 너무 단호하니 당황스러웠다.
이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이건 권유가 아니라 주군으로서 내리는 명령이에요.”
신분과 작위로서 알도르 경을 굴복시키는 것.
“사용인들과 함께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돌아가세요.”
내 명령이 내키지 않는지, 알도르 경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나 역시 알도르 경에게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래야 그를 비롯한 모두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나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저는…….”
“아, 그리고 이제 아가씨가 아니라 공작 각하나 단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해요. 명색의 부단장인데 다른 기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죠.”
내가 정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알도르 경이 그 틈을 파고들려고 할 테니 어쩔 수 없이 호칭을 정정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의 낯빛이 좀 더 어두워졌다.
상당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끙. 저런 표정을 지으니 마음이 흔들리네.
“더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나가 보세요, 알도르 경.”
“…….”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끝내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 * *
“어서 오세요, 마티나 백작.”
그날 오후, 마티나 백작이 레오폴드 공작가에 방문했다.
물론 내가 부른 거였다.
마티나 백작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지고 온 상자를 내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이건 감사의 선물입니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하하, 공작 각하께서 친히 초대해 주셨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오겠습니까.”
마티나 백작이 준 상자에는 노란 토파츠가 촘촘히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팔찌를 보니 예전에 받은 도청 마법이 걸린 브로치가 생각났다.
현재 그 브로치는 마법 차단 결계가 있는 지하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척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마티나 백작.”
마티나 백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테시스 백작처럼 속았을 수도 있으니 나는 집사에게 팔찌가 든 상자를 넘겨주며, 마티나 백작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그 창고에 두라고 말했다.
“응접실은 이쪽이에요.”
그리고 마티나 백작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내가 마티나 백작을 맞이하는 사이 응접실의 티테이블을 세팅해 둔 하녀가 조용히 물러났다.
“여긴 하나도 안 변했습니다.”
마티나 백작은 추억을 되짚는 듯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응접실을 돌아다니며 둘러봤다.
“홀과 복도는 바뀌었길래 이곳도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선대 공작 각하께서 계셨을 때, 그대로군요.”
나는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아버지의 자취를 전부 지우긴 아쉬워서 일부러 몇 군데는 남겨 뒀어요.”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재차 응접실을 둘러본 마티나 백작이 긴 여운이 남은 표정을 지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자주 이곳을 방문했었나요?”
나는 찻잔을 그의 쪽으로 살짝 밀며 물었다.
마티나 백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수도에 올 때마다 꼭 들리긴 했습니다. 그리고 각하와 술잔을 기울였죠.”
“아버지께선 술을 못하셨던 걸로 아는데요.”
“그럴 리가요. 각하께선 술을 무척 잘하셨습니다. 저와 술 내기를 했을 때도 몇 번이나 이기셨는걸요.”
“그래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네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년식 날, 내가 고작 술을 몇 잔 먹은 걸로 해롱해롱하니 아버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나를 닮아서 술을 못하는구나. 네 엄마를 닮았다면 잘했을 텐데, 안타까워.]
그런데 귀족들 사이에서도 술고래라고 소문이 난 마티나 백작을 몇 번이나 이기셨단 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보다, 하고 넘어갔을 텐데 많은 걸 알게 되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 누구보다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조금씩 사라졌다.
“하온데 저는 왜 부르신 건지…….”
마티나 백작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왔다.
그래. 일단 이 문제부터 해결하자.
“사실 마티나 백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이리 불렀습니다.”
예상했던 일인지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닷새 후, 제국의 북쪽령에 터를 잡은 귀족들을 전부 한자리에 소집해 주세요.”
이번에는 놀란 듯 마티나 백작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들을 전부 말입니까?
“네. 그들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거든요.”
“허면 공작 각하께서 직접 하시는 게 나으실 텐데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요.”
그만큼 나를 주시하는 눈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제가 있었으며, 루센 공작도 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으니 여러모로 조심해야 했다.
“그러니 마티나 백작의 이름으로 회의를 소집해 주세요. 다른 귀족들이 이 일에 대해 아는 건 상관없지만, 모이는 건 북쪽령 귀족들뿐이어야 하며 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그 누구도 몰라야 합니다.”
“흐음, 뭐 때문에 북쪽령 귀족들을 불러 모으려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는데, 저보고 그들을 소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티나 백작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맹세컨대 마티나 백작을 비롯한 북쪽령 귀족들에게 불리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들을 소집해 주세요.”
“……저도 포함입니까.”
“그럼요. 마티나 백작도 북쪽령 귀족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부탁할게요, 마티나 백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티나 백작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간청했다.
“아버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
마티나 백작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그는 내가 아닌 탁자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마티나 백작!”
내가 온몸으로 기뻐하며 웃자, 마티나 백작도 기쁘다는 듯 웃어주었다.
“그런데 북쪽령 귀족들을 어디로 부르면 될까요? 공작 각하께서 이 일과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공작저로는 부르지 못할 테고. 제 저택으로 부르면 될까요?”
“아니요. 그것도 눈에 띌 거예요.”
마티나 백작의 저택 역시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화이트 리브가에 있으니까.
“그럼 어디로 부르면 좋을까요?”
“잠깐만요.”
그것도 다 생각해 둔 장소가 있지.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도의 지도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펼쳤다.
“여기.”
그리고 수도의 외곽, 물류 창고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을 가리켰다.
“이곳에 가면 테시스 상단의 소유인 물류 창고들이 있어요. 그중 붉은색 리본이 묶여 있는 창고로 들어오면 됩니다.”
“테시스 백작가를 미리 포섭해 두신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네? 그런데 어떻게 테시스 상단이 소유한 물류 창고를…….”
“그 부분도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내 대답에 마티나 백작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이것 참. 물어보는 것마다 비밀이라고 하시니,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군요.”
“죄송해요, 마티나 백작. 백작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숨길 수밖에 없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세요.”
“물론 이해합니다. 언젠가 다 설명해 주실 거라고도 믿고 있고요.”
“물론…….”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며 문을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쉿.”
나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해 달라는 제스처를 보낸 뒤,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마티나 백작과 나눈 대화는 그 누구도 들어선 안 되기에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에게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로 응접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그런데 누가 내 명령을 어기고, 응접실 주변을 서성이는 걸까.
누구든 간에, 설령 실수라고 해도 가벼이 넘기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없어?”
분명 인기척을 느꼈는데, 아무도 없다니.
이건 이거대로 당황스러우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에도 황제가 심어 둔 쥐새끼가 있을지 모른다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