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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196/262)

202화

“차였냐?”

뜬금없이 나온 질문에 창틀에 기대고 있던 페르데스의 팔이 미끄러졌다.

페르데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대현자, 비블로스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아니야?”

“아닙니다.”

“하지만 딱 차인 사람의 표정인데.”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던가. 페르데스는 황급히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지만,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차인 거 아니야?”

“도대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그래. 아직은 차인 게 아니었다.

비록 아델에게 고백한 뒤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거나 그러지는 않았으니 차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지도.

아델과의 일을 떠올린 페르데스의 표정이 우울하게 가라앉자, 비블로스가 다시 물었다.

“차인 거 맞지?”

이 정도면 그냥 날 엿 먹이고 싶은 게 아닐까.

페르데스가 그런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비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다 정리한 뒤에 떠나자고 했을 땐 그러자고 했으면서, 약혼녀랑 연락하더니 갑자기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굴렀잖아.”

그랬었지. 그래서 지금 비블로스와 함께 제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있는 거고.

그노시스는 나이가 많아서 급박한 일정을 소화하기 버거울뿐더러, 아델이 붙여 준 안내인을 속이기 위해 아르티나 왕국에 남았다.

“그래서 약혼녀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말한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왜 갑자기 서둘러서 제국으로 돌아가려는 건데?”

돌아온 질문에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졌다.

“불안해서요.”

그는 두 손을 마주 쥐고,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인 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요.”

정확히는 아델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자 비블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팔짱을 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내 일정을 무려 사흘이나 앞당긴 거라고? 나와 단 1분이라도 대화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래서 말했을 텐데요. 같이 가기 싫다면 남아도 좋다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죠. 그런데도 따라오신 건 대현자님인 걸로 압니다만.”

“흥! 네 놈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말하는데 어떻게 혼자 보내?”

“그게 아니라 제가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궁금해서 따라온 거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인 줄 알아?”

그럼 아니었습니까?

페르데스는 그렇게 물어보려다, 싸움을 거는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이상한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이것 좀 봐 주세요.”

“뭐야. 말 돌리는 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누가 봐도 말을 돌리는 것 같…….”

미운 7살처럼 깐죽거리던 비블로스는 페르데스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장난기가 넘치던 얼굴이 한순간 진지해졌다.

누가 대현자 아니랄까봐 마법진에는 항상 진심이네.

페르데스는 속으로 웃으며 마법진을 마저 그렸다.

예전에 아델이 이것 때문에 잠긴 서랍을 열 수 없다며, 해제할 방법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던 고대 마법진이었다.

페르데스는 그 뒤로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그노시스에게도 자문을 구해 봤으나, 이 고대 마법진을 풀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혹시 대현자이자 드래곤인 비블로스라면 알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보려는데, 비블로스가 먼저 물었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네. 스테레오스입니다.”

“알고 있는 건 단순히 그것뿐?”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고대 마법진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어진 대답에 비블로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사실을 알려준 건 네 약혼녀인가?”

“아니요. 스승님이 알려 줬습니다.”

“너한테 마도사에 대해서 알려 주었던 스승?”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 이름이 뭐지?”

“그노시스입니다.”

“그노시스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비블로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마법진을 알고 있다니. 그것 참 이상하군. 그래. 정말 이상해. 그러니까 한 번 만나 봐야겠어.”

그러더니 벌떡 일어섰다.

불길한 예감이 든 페르데스가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네 스승 만나러.”

“그는 아르티나 왕국의 수도에 있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잠시 다녀오겠다는 거다.”

“그 무슨……. 설마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뛰어내리진 않고, 텔레포트로 잠시 다녀올 생각인데.”

“텔레포트 스크롤이요?”

그건 아주 짧은 거리 밖에 이동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아르티나 왕국까지 간다는 거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페르데스가 눈만 깜빡이자, 비블로스는 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잠시 잊은 모양이군.”

아. 그러고 보니 그는 드래곤이었지.

모든 종족을 통틀어 최강이라고 불리는 드래곤.

드래곤이라면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텔레포트를 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봐서 확실하게 가능한 것 같았다.

“가서 네 스승에게 어떻게 저 마법진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기만 할 거라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건 왜 물어보려는 겁니까?”

“그야 그 고대 마법진은 레드 드래곤의 유산이거든.”

레드 드래곤이라니. 페르데스는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그 마법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비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주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공부하다가 알아냈을 가능성이 있지만, 내가 아는 실력 있는 마도사 중에서 그노시스라는 이름은 없거든.”

“……대현자님이 모르는 마도사일 수도 있죠.”

“그럴 리가. 레드 드래곤의 유산인 고대 마법진을 알 정도로 능력 있는 마도사를 내가 모를 리가 없어.”

페르데스는 비블로스가 묘하게 그노시스를 까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노시스도 이 마법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했고.

“그러니 가서 물어보고 올게. 어떻게 이 마법진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 말이야.”

“그거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걸 말해도 될지 고민했는데, 어차피 비블로스가 그노시스를 만나면 알게 될 테니 페르데스는 제 입으로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노시스가 젊었던 시절, 에튀모스의 유적지에 간 적이 있는데…….”

페르데스는 그노시스가 에튀모스 유적지에 간 것부터 시작해서 그곳에서 이것과 같은 마법진을 발견한 것, 그리고 뛰어난 마법사이자 마도사를 만나 그에게 이 마법진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배웠다는 것 등 아는 걸 전부 말했다.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비블로스가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래서 실력이 없는데도 저 마법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였어.”

“실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물론 대현자이자 드래곤인 그에 비하면 그노시스의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제국 내에선 나름 유명한 마도사였다.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어주고 많은 걸 도와준 스승이기도 했고.

그런데 자꾸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게 거슬려서 페르데스가 한마디 하자, 비블로스가 웃었다.

“그래, 그래. 알았다. 네 스승이라 이거지?”

“…….”

“하여간 네 스승에게 그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른다고?”

“네.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고 홀연히 떠났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그 남자는 아델의 부친이자 선대 레오폴드 공작일 가능성이 매우 컸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이것뿐일까. 이 마법진이 아델의 부친이 쓰던 서랍에 있었다는 것 역시 말하지 않았다.

아델이 직접 물어보겠다고 했으니, 그녀와 관련된 것들은 궁금해도 일단 함구하기로 했다.

“그럼 그 남자가 드래곤일 가능성이 크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비블로스가 엄청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에튀모스 유적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했으니, 아마 레드 드래곤 쪽이겠지.”

“……정말로 그 남자가 레드 드래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드래곤일 수도 있고, 그 후손일 수도 있어. 뭐, 내가 직접 만난 게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봐. 대략 90퍼센트 정도?”

90퍼센트면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수많은 드래곤 중 하필 레드 드래곤이라고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폴드 공작가는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었으니까.

‘설마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게 아니라 그 드래곤이 레오폴드 공작가를 건설한 건가?’

그럼 아델은 레드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인 걸까.

모르겠다.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물어봤는데, 오히려 쌓여 가니 머리가 아파 페르데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그 표정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그게 아니라 대현자님도 이 마법진을 풀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겁니다.”

“모르긴 누가 모른다고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다니.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뜻밖의 횡재였다.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습니까? 알려 주세요.”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절대로 그 마법진은 못 풀걸.”

“방법이 어렵습니까?”

“어렵기보단 까다롭거든.”

비블로스가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페르데스가 그린 마법진을 가리켰다.

“디아볼로스랑 마찬가지로 그 마법진 역시 생명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야. 그러니 해제하려면 그 마법진을 만든 자의 생명력이 필요하지. 그자의 후손이라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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