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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화 (195/262)

201화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황제를 바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입구에서 바로 거절을 당할 줄은 몰랐는데.

기분이 조금 나빠져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시종장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쯤이면 폐하를 뵐 수 있죠? 가능한 날짜로 약속을 잡고 싶은데.”

“그 부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는 바가 없단 말이지.

“폐하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대신 전해 드리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말씀드려야 해서요. 그런데 말이죠.”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시종장을 쳐다봤다.

“황제 폐하께서 누가 찾아오면 보고도, 약속도 잡지 말고 무조건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바로 거절하는 거죠? 아, 혹시 나 같은 건 황제 폐하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거절하는 건가?”

시종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째서 황제 폐하께 제가 온 것도 보고하지 않고,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거죠? 폐하께서 무조건 돌려보내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라면서?”

“지금 당장 폐하께 공작 각하께서 오신 걸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쓸데없이 변명을 늘어놓으면 완전히 찍어 누르려고 했는데, 눈치챘는지 그는 시종에게 내 안내를 맡기고 쏜살같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시종이 안내해 준 응접실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온 시종장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보고했다.

“송구하오나 황제 폐하께선 지금 공작 각하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이니, 다음에 약속을 잡고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왜 만날 수 없는 상황인가요?”

“그 부분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렇겠지. 암살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황제의 상황은 말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으니까.

“그럼 언제쯤 황제 폐하를 만날 수 있나요?”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나흘 뒤에 점심 만찬을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아직 기약이 없다거나, 한참 뒤에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나흘 뒤라니.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네.

“그럼 나흘 뒤에 다시 오죠.”

약속도 잡았겠다, 더는 볼일이 없으니 미련 없이 일어섰다.

곧바로 황궁을 나서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오랜만이네요, 레오폴드 공작.”

“……오랜만입니다, 황비 전하.”

바로 3황비였다.

일면식이 거의 없는 그녀가 이토록 반갑게 인사를 한다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의미.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나요? 공작에게 긴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황후와 1황비, 그리고 2황비가 황실과 그들의 가문에 끈끈한 연결 고리를 위해 황궁에 들어왔다면, 3황비는 순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궁에 들어온 케이스였다.

일개 자작가의 영애를 황비로 들인다고, 귀족들이 기함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3황비라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황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가령 최근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치적인 부분을 전부 일임하고, 황제의 궁에 칩거하는 이유라던가.

“이쪽으로 와요.”

3황비를 따라 황실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분수대가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티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시녀가 찻잔을 채워 주고 조용히 물러났다.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대기하는 걸 봐서, 3황비가 미리 언질을 해 둔 모양이다.

“정신 안정에 좋다는 캐모마일이에요. 요즘 위조 금화 문제 때문에 여러모로 머리가 아프실 테니, 이거 먹고 힘내요.”

“감사합니다.”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망할 예법 때문에 마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니 나는 입술을 적시는 정도만 마셨다.

“어때요? 괜찮죠?”

“네. 한데 제게 묻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3황비가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는 걸 방지하고자, 대놓고 물었다.

그런 내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3황비의 입술이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녀는 멀찍이 서 있는 시녀들을 슬쩍 흘겨본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황제 폐하를 뵀나요?”

“아니요. 지금은 만날 수 없다고 하셔서, 뵙지 못했습니다.”

“정말인가요? 공작은 폐하의 궁에 오래 있었잖아요.”

“저를 감시하신 겁니까?”

기분 나쁜 티를 팍 내며 되묻자, 3황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공작을 감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황제 폐하의 궁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확인하고 있어서……. 아, 그렇다고 황제 폐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 아니고요.”

많이 당황했는지, 3황비는 횡설수설하며 묻지도 않은 사실들까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하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도 모자를 판국에 저렇게 대놓고 티를 내다니.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에게도 제가 그랬다는 걸 말하지 말고요.”

“네. 그러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이런 빈말도 곧이곧대로 잘 믿고 말이지.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3황비는 황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공작도 폐하를 뵙지 못했다니……. 혹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만약 폐하께서 아프셨다면, 황궁의가 황제의 궁에 부지런히 드나들었을 겁니다.”

“다행히 그건 아니더라고요.”

이미 황궁의 쪽도 알아본 건가. 대단한 집착이었다.

하긴 3황비는 황제의 총애 말고 믿을 곳이 없으니, 집착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녀의 소생인 7황자가 있긴 하지만, 황위 계승 순위가 한참 밀리는 데다가 아직 어려서 3황비를 보호해 줄 만한 힘이 없었다.

수도에 제대로 된 저택도 없는 친정에 기대는 것도 무리였고.

3황비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폐하를 못 뵌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전에 폐하와 식사 자리를 가진 걸로 압니다만.”

“그건 황실 식구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잖아요. 폐하를 뵀다고 할 수 없죠.”

이건 무슨 신박한 헛소리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빤히 쳐다보자, 3황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동안 제 궁을 방문해 주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말한 거였어요.”

“……그렇습니까.”

“네. 예전에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제 궁에 들리셨는데, 요즘은 얼씬도 안 하세요.”

바쁜 사람을 붙잡고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건지 궁금했는데.

“그래서 폐하께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 의심했었거든요.”

뒤이은 말과 날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날 황제의 새로운 여자라고 생각했구나.

아무리 생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너무 불쾌한 망상이었다.

내가 인상을 팍 쓰자, 3황비가 황급히 변명했다.

“물론 폐하와 공작이 그런 관계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하지 않긴. 방금 그런 눈으로 날 봤으면서. 

“공작은 4황자와 결혼할 사람이니까. 설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진 않겠죠.”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황비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이 저인가요? 아니면 황제 폐하인가요?”

“그건…….”

대답하기 힘든지 3황비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얼른 가 보세요, 레오폴드 공작.”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꺼지라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가 너무 삐뚤어진 걸까.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는 앉아 있을 이유가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기꺼이 일어섰다.

3황비와의 대화는 참으로 쓸데없었지만, 황제의 행동이 한 달 전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가 아프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난 생을 통틀어 이 시기에 황제가 아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는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팔팔한 상태로 내 숨통을 옥죄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는 유난히 조용하네.”

다른 생에선 잠시라도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이번에는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황제가 날 노리고 있다는 걸 한 번씩 깜빡할 정도로 조용했다.

다른 사람이 이러면 드디어 체념했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절대 체념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큰 도약을 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마치 나처럼.

“…….”

나는 긴 회랑을 걸어가다 말고 황제의 궁 쪽을 돌아봤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어디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황제의 궁은 굉장히 크고 화려했다.

그래서 더욱 기대됐다.

저 궁이 볼품없이 무너지는 그 날이 말이지.

“이제 곧 볼 수 있을 거야.”

레오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위해 떠났으니까.

내 간절한 염원을 담은 폭죽을 터뜨리기 위해서 말이지.

“화려한 불꽃이 터졌으면 좋겠다.”

제국의 하늘을 가득 채우는 아주 크고 화려한 불꽃이 터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서 만천하에 내 계획이 성공한 걸 알리고 싶어.

그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으흐흥.”

나는 흥얼거리며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째깍, 어디선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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