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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193/262)

199화

밝은 보름달이 세상을 밝히는 늦은 저녁.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드디어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페르데스에게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나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대현자가…… 드래곤이라고요?”

[그래.]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가격한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페르데스가 느닷없이 드래곤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뭔가 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설마 대현자가 드래곤일 줄이야.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확실한 거예요? 넘겨짚으시는 건 아니죠?”

[아니야. 대현자가 제 입으로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인정했어.]

만약 대현자가 그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더라도 드래곤이라는 터무니없는 종족으로 속이진 않을 테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대현자가 사실은 드래곤.

다시 생각해 봐도 놀랍고 황당해서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드래곤이 환상 속의 종족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하긴 실존했으니까 초대 레오폴드 공작이 레드 드래곤에게 축복을 받은 거겠지만.

“하, 하하…….”

[많이 놀랐나 보네.]

내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 페르데스가 다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하긴 나도 처음에 듣고 무척 놀랐으니까. 지금도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그런 것치고 매우 차분하신데요.”

[목소리만 그렇게 들리는 거야. 지금 내 모습을 봤으면 그런 말 못 할걸?]

“그래요?”

[응. 그나마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괜찮지만, 아까는 더 심했어. 그대가 연락했을 때 말이야.]

페르데스가 멋쩍게 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현자가 사실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무척 놀라서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거든.]

그러고 보니 그때 페르데스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긴 했었지.

[어떻게 하면 대현자한테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하기도 했고.]

“무슨 정보요?”

[뭐, 이것저것. 드래곤에 관한 거라던가. 아니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드래곤의 축복에 관한 거라던가.]

“아.”

그래서 대현자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겠다고 한 거구나.

비로소 의문들이 풀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대현자한테 나랑 그대의 정체를 밝혔어.]

“우리 둘의…… 정체를요?”

[으응. 그게, 대현자한테 그대를 만나 달라고 부탁해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대도 대현자가 드래곤에 대해 잘 알면 만나겠다고 했잖아.]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그래서 그런 건데……. 혹시 화났어?]

“아니요. 화는 안 났어요.”

그래. 화는 나지 않았지만, 조금 당혹스럽긴 했다.

페르데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드래곤이 말을 함부로 옮기고 다니는 수다쟁이일 수도 있고, 엉겁결에 페르데스의 정체를 까발릴 수도 있는 거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페르데스가 말했다.

[대현자한테 나와 그대의 정체를 모르는 척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도 그러겠다고 약속했으니, 혹 정체가 들킬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대현자도 레오폴드 공작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더라. 공작가를 살짝 언급했을 뿐인데, 먼저 그대를 만나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왜 만나고 싶은지 이유는 물어봤나요?”

[물론 물어봤지. 그건 그대를 만난 뒤 얘기하겠다고 말해 주지 않았지만.]

지금 페르데스에겐 할 수 없는, 나를 만난 뒤에는 말할 수 있는 이유라.

굉장히 꺼림칙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많은 건 확실한 것 같아. 그대가 이곳에 오는 걸 기다리려면 시일이 많이 걸리니, 직접 널 만나러 가겠다고 하더라.]

지금 뭐라고…….

“대현자가 레오폴드 공작령에 온다는 건가요? 지금 바로?”

[지금 바로는 아니고, 하던 걸 얼추 마무리 지은 뒤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대략 사흘 뒤에 출발할 것 같아.]

페르데스도 대현자와 함께 올 테니, 어쨌거나 그의 귀국이 계획했던 것보다 빨라진다는 의미였다.

이것 참. 어떻게든 그를 떼어 놓으려고 머나먼 아르티나 왕국까지 보냈는데, 전부 소용없는 짓이 됐잖아.

[혹시 내가 돌아가는 게 싫은 건가?]

역시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페르데스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에게는 어쭙잖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기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나았다.

실제로 레오에게 그 방법을 썼을 때 먹히기도 했고.

“…….”

그러니 페르데스에게도 사실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해야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말을 하지 못하게 내 목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럴 리가요.”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페르데스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저야 언제든지 페르데스님이 돌아오는 걸 환영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썩 좋지 않아요.”

[무슨 일 있어?]

“페르데스 님이 아시다시피 위조 금화 사건 때문에 저희의 결혼식이 기약 없이 밀렸잖아요. 그것 때문에 황제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 페르데스 님이 눈에 띄면 걸고 넘어질 것 같아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막상 입을 여니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가령 결혼식은 나중에 해도 혼인 신고부터 하라던가. 아니면 아이부터 가지라고 닦달할 수 있죠. 미약 같은 걸 먹일 수도 있고요. 예전에는 페르데스 님이 미성년자라서 조심했지만, 이젠 성년이니 막 나갈 가능성이 커요.”

[예전에도 나한테 이상한 약을 먹이려고 한 걸 보면 딱히 조심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오래된 일이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미약 성분이 없는 걸로 준비해 줬잖아요.”

[퍽이나.]

페르데스가 몹시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당분간은 이곳에 있으면서 황제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지?]

“네. 거기다 위조 금화 사건 때문에 국경의 경계가 강화됐어요.”

이건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조된 신분증으로 국경을 오고 간 게 걸리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제국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내 말을 믿는지, 페르데스가 반쯤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언제쯤이면 가도 괜찮을까?]

“글쎄요. 상황이 좀 진정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되도록 빨리 말해 줘.]

“네. 그럴게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불빛이 사라진 통신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다른 반지를 꺼냈다.

레오와 하나씩 주고받은 통신 반지였다.

지금은 그를 무사히 속인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이상한 걸 눈치채고 제국으로 오려고 할 수도 있고, 드래곤이라는 그 대현자가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확실히 막아 두는 게 좋겠지.

톡톡, 통신 반지를 두드리자 퓨라가 붉게 반짝거렸다.

잠시 후, 퓨라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각하?]

“너한테 부탁할 게 생겨서.”

[아, 그런 거라면 잠깐만요.]

뭔가를 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말씀하세요]

“혼자 있었던 거 아니야?”

[맞는데, 혹시 누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 문을 잠갔어요.]

치밀한 성격이네. 그래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뭔가요?]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야?”

[지금요? 붤린에 있습니다.]

붤린은 연합국의 서쪽에 위치한 국가로, 7개의 연합국 중에선 두 번째로 제국과 가까웠다.

“그곳에서 메데스 왕국의 햅번까지 얼마나 걸리지?”

제국과 가장 가까운 왕국은 메데스 왕국이었다.

[으음, 기차를 타면 대략 사흘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럼 곧장 햅번으로 가서 플랭키 로이드라는 사람을 찾아가. 달이 뜬 여관에 머물고 있을 거야.”

플랭키 로이드.

프로페테스 4세가 내게 편지를 보낼 때 쓰는 위장 신분이었다.

지금 그곳에 있는 플랭키 로이드는 프로페테스 4세가 아닌 그의 호위 기사이자 아카데미 교관이었던 로고스 경이었지만.

“그를 만나면, 지금 바로 보내 달라고 전해 줘.”

[그 말만 전해 주면 되나요?]

“그래.”

[쉬운 일이네요. 알겠습니다.]

자신만 믿으라며 레오는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 쉬라고 했는데, 또 일을 시키네.”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이게 더 좋은걸요. 일하는 체질이라 그런가.]

“그럼 앞으로도 곁에 두고 많이 부려 먹어야겠네.”

레오가 장난스럽게 말하니, 나 역시 장난으로 응수했다.

[…….]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통신이 끊긴 건 아니고……. 혹시 내 말에 상처를 받은 건가?

“상처받았으면 미안.”

[푸흡.]

바로 사과하자 레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상처받은 거 아니었어?”

[하하, 제가 이런 걸로 상처를 받을 리가 없잖아요. 아직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흐음, 이게 더 상처인데요?]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레오의 목소리가 한순간 낮아졌다.

입에 반지를 가까이 대고 말하는지, 그는 속삭이는 듯 내게 물었다.

[그래서 말하는 건데, 제가 평생 각하의 곁을 지켜도 될까요? 참고로, 전 첩이라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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