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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192/262)

198화

“미쳤군요.”

아니, 이건 미쳤다는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내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나자, 루센 공작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름 용기를 내서 고백한 건데 너무 매정하군요.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잘됐네요. 상처받은 김에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친절하게 사라질 방향까지 가리켜 줬건만, 루센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러는 게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었다.

정말이지, 황제와 다른 의미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었다.

이전 생에선 그와 엮일 일이 없었는데, 이번 생에선 왜 이렇게 그와 엮이는 걸까.

아무리 내 행보가 이전 생들과 비교했을 때 완전히 달라졌다지만, 루센 공작이 엮일 만한 계기를 준 것 같지는 않은데.

“레오폴드 공작은 원래 그렇게 냉정한 성격입니까?”

“그러는 루센 공작은 원래 그렇게 뻔뻔하고 염치가 없나요? 제게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결혼한 사람들도 다른 이성에게 절절하게 사랑 고백을 하는 와중에 약혼이 무에 대수라고.”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으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하.”

몹시 기가 막혀 실소하며 쳐다보자 루센 공작이 뺨에 손을 대고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열렬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너무 부끄러운데요.”

“…….”

“농담이니 정색하지 마세요.”

저딴 개소리를 하는데, 내가 정색하지 않게 생겼어?

“그런데 4황자 전하와 결혼할 마음이 있긴 한 겁니까?”

“너무 당연한 걸 묻는군요. 결혼할 마음이 없는데 페르데스 님과 약혼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모르는 거죠. 2황자 전하와 결혼하기 싫다거나, 황제 폐하의 뜻에 반발하고 싶어서 4황자 전하를 선택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발언에 나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화가 나 주먹을 움켜쥐며 매섭게 루센 공작을 노려봤다.

“제가 공작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이렇게 복수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제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하긴 4황자 전하께선 진심으로 레오폴드 공작을 좋아하는 것 같긴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루센 공작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루센 공작이 알아챌 만큼 페르데스가 제 마음을 보여 줬나 싶기도 했고.

어쨌거나 달가운 관심은 아니었다.

이 이상 쓸데없는 관심은 끄라고 말하려는데, 루센 공작이 먼저 물었다.

“레오폴드 공작은 어떻습니까?”

내 모습을 담은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4황자 전하와 같은 마음입니까?”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없지요.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제가 이상한 망상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대답해도 할 것 같은데요.”

“음, 그거야 그렇죠.”

이 사람, 정말 뻔뻔하구나.

회의에서 황태자와 기 싸움을 했을 때보다 더 피곤해서 눈두덩이를 지그시 누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습니다. 공작이랑 더 이야기했다간, 정말로 정신이 나갈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죠.”

“그럼 저와 결혼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제가 왜 루센 공작과 결혼해야 하죠?”

“4황자 전하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말한 겁니다만.”

“아닙니다.”

그래. 결혼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페르데스라는 사람 하나만 두고 보자면,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또 거절당했군요.”

루센 공작의 눈매가 서글프게 접혔다. 

“벌써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다니. 여린 마음에 생채기가 깊게 남았습니다.”

루센 공작의 마음이 여리다니. 지나가던 개도 정색할 만한 헛소리였다.

그리고.

“어차피 진심이 아니잖아요.”

가슴을 움켜쥔 채 이상한 쇼를 벌이던 루센 공작이 멈칫했다.

“절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도,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장난스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가슴을 움켜쥐던 손 역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말로 자꾸만 장난치는 거, 굉장히 불쾌합니다.”

“…….” 

“정중하게 부탁할 테니 여기서 그만하시죠.”

내 부탁이 통한 걸까.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루센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 참.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껌뻑 속아 넘어가던데, 공작에겐 먹히지 않으니 난감하군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넘어간 그 사람들이 이상한 것 같은데.

“그래도 레오폴드 공작과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당신과 결혼하면,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그 생각은 부디 접어 두길 바랍니다.”

루센 공작과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세상에 남자가 루센 공작뿐이라고 해도 절대 그쪽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것 참. 정색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진심으로 상처받는데요.”

“진심으로 상처받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야 더는 저딴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

아예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더 좋고.

“그래서 진짜 할 말이 뭐죠? 설마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절 붙잡은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제가 공작을 붙잡은 건 이것 때문입니다.”

루센 공작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직접 확인하시죠.”

도대체 뭐길래 저러는 거지.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루센 공작을 흘겨본 뒤, 쪽지를 확인했다.

쪽지에는 [살려 줘. 살고 싶어. 여기서 꺼내 줘.]라고 적혀 있었다.

……체르노서의 필체로.

자연스럽게 체르노서의 유서라고 생각했던 이전 쪽지가 떠올랐다.

“이거……. 어디서 발견한 거죠?”

“람바야 강입니다. 어떤 평민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유리병을 주웠는데, 그 안에 들어 있었다며 일주일 전에 제 보좌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날짜만 빼면 내게 체르노서의 쪽지를 가져다주었던 소년이 말한 것과 상황이 똑같았다.

이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그 쪽지의 연장선인 걸까?

죽은 줄 알았던 체르노서가 사실은 멀쩡하게 살아 있고, 그래서 살려 달라고 쪽지를 쓴 거라면…….

“어쩌면 2황자 전하께선 살아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

루센 공작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긴 이 쪽지를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겠지.

정말로 체르노서가 살아 있다면,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아마도 레오폴드 공작가의 지하실일 것이다.

정확히는 지하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간 침입자들이 사라지는 또 다른 공간.

정말로 체르노서가 그곳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를 꺼내 줘야 하는 걸까?

어떻게?

나는 그곳에 가는 방법을 모르는데.

“뭔가 알고 있군요.”

확신에 찬 말에 혼자만의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아는 건 없습니다.”

“그런 것치곤 상당히 동요하던데요.”

“그건 공작의 말대로 2황자 전하께서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겁니다. 공작도 알다시피 2황자 전하의 시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저도 의심한 거고요.”

과연 그가 품은 의심은 어디까지 가지를 뻗었을까.

내게 이 쪽지를 보여 준 이유는 뭐지?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에겐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2황자 전하의 사건을 담당하는 조사관에게 이 쪽지를 보여 줬나요?”

“아직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역시 아니었다.

“이 쪽지가 정말 2황자 전하께서 쓰신 건지 확인부터 하고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공작이 보기엔 2황자 전하께서 직접 이 쪽지를 쓰신 것 같습니까?”

“글쎄요. 그 부분이라면 저보단 필체 감정사한테 감정받는 게 더 확실할 것 같은데요.”

“감정이라면 이미 받았습니다. 그래서 묻는데.”

루센 공작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은 이 쪽지가 체르노서 황자 전하의 것이라는 걸, 어떻게 바로 알아본 겁니까?”

“……!”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는 게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전혀 아닌 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루센 공작이 말해 준 덕분에 알았죠.”

“제가 말입니까?”

“네. 공작이 어쩌면 2황자 전하께서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고 말하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페르데스와 함께 지내면서 향상된 연기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완벽하게 속이는 건 무리였는지, 루센 공작이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여기서 시선을 피하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니, 떨리는 심장을 꽉 부여잡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를 바라보던 와중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루센 공작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달리 뭔가 알게 되면 꼭 제게 말해 주세요.”

“그러죠.”

“그리고 제가 고백한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요.”

“……그건 거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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