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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191/262)

197화

뜬금없이 힘을 보태 달라니.

여전히 황태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귀족들은 어리둥절해 서로를 바라봤다.

“레논 백작과 다른 분들이 말한 것처럼 이미 제국 전역에 퍼진 위조 금화를 전부 회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금화를 새로 발행하는 게 시간적으로 따져 봤을 때 더 효율적이지요.”

“크흠.”

황태자가 또 다시 반황제파 귀족들의 편을 들자 맥밀 후작을 비롯한 황제파 귀족들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황태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더니, 반황제파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맥밀 후작이 말한 대로 금화를 새로 발행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 그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황태자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좌중이 조용해졌다.

일말의 불안한 예감을 느낀 반황제파 귀족, 레논 백작이 대표로 물었다.

“그 말씀은…… 저희에게 그 비용을 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

“그, 그럴 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반황제파 귀족들은 무척 당황하며 술렁거렸다.

반면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하면 제국민들의 부담을 줄이면서 위조 금화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겠군요!”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황태자 폐하.”

황제파 귀족들은 언제 황태자를 비난했냐는 듯, 입을 모아서 그를 칭찬했다.

이에 황태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파 귀족들에게 물었다.

“그럼 전부 제 의견에 동의하는 겁니까?”

“동의하다마다요.” 

“좋은 의견을 내 주셨는데, 저희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정말 다행입니다.”

황태자가 진심으로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건 여기 있는 모두가 도와줘야 하는 일인지라 한 분이라도 반대했으면 진행하기 힘들었을 텐데……. 정말로 다행입니다.”

모두.

반황제파 귀족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를 아우르는 말에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반황제파와 황제파 귀족은 물론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던 중립파 귀족들까지 깜짝 놀라며 황태자를 바라봤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조 금화 사건이 터진 이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안건들이 나왔지만, 황제는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지 않을 뿐더러 먼저 나서서 이렇게 하자고 제안을 하지도 않았다.

제국의 경제가 크게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황제 같은 능구렁이가 아무 생각이 없이 가만히 있는 건 아닐 터.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고,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꿍꿍이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는 회의가 열리기 한 시간 전, 불참 의사를 밝히고 황태자를 대신 참석 시켰다.

황태자는 회의 내내 갈대처럼 흔들리기만 했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예의 주시했는데, 설마 이런 폭탄을 터뜨릴 줄이야.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황태자는 그의 의견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건 필시 황제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황권이 강하다고 해도, 귀족들과 척을 쳐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엄청난 폭탄을 터뜨릴 거라면 황제가 직접 참석해서 말하는 게 좀 더 효과적이고, 귀족들의 반발도 적었을 텐데 굳이 황태자의 입을 빌린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건 마치 귀족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발하며 난동을 부려 주길 바라는 것 같잖아.

당장 눈앞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술렁거렸다.

황태자에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용기 있게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자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금 전만 해도 제 의견이 괜찮은 것 같다고 하더니. 갑자기 반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반대하는 건 아니옵고…….”

“여러분이 조금씩 도와준다면 굳이 세금을 많이 거두지 않아도 금화를 새로 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가 부탁한다는 말까지 하니 귀족들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눈썹을 찡그리며 그런 귀족들을 바라보던 황태자가 갑자기 날 돌아봤다.

페르데스와 똑같은 색이지만, 느낌은 완전히 다른 눈동자가 예쁘게 휘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폴드 공작의 의견을 아직 듣지 못했군요. 공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순간 회의실의 모든 시선들이 내게 꽂혔다.

그 시선도 불편했지만, 가장 불편한 건 같잖은 그의 계획에 날 끼워 넣으려는 황태자의 의도였다.

정확히는 황제의 의도겠지만.

무슨 생각으로 날 끼워 넣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순순히 당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반대할 거라고 기대라도 했던 걸까. 곳곳에서 깊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황태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러나 예리한 눈으로 날 주시하며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은 그 누구보다 제국민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니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절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황태자 전하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호오, 그럼 반대한다는 겁니까?”

“그렇다기보다 고려해야 할 부분이 몇 가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려할 부분이라. 그게 뭐죠?”

“우선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귀족들이 금화를 새로 발행하는 비용을 감당하면 평민들은 편해지겠지만, 그만큼 귀족들이 힘들어질 겁니다. 이미 위조 금화 사태로 피해를 본 귀족들이 수도 없이 많은 상태이기도 하고요.”

귀족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금화를 새로 발행하면, 이 역시 귀족들에게 큰 타격을 줄 겁니다. 금화는 대체로 귀족들이 많이 쓰는 화폐니, 평민보다는 귀족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흐음.”

“그건 황실 역시 마찬가지이고, 더 나아가 타국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제국의 금화는 제국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쓰이는 화폐니까요.”

“맞습니다. 특히 타국과 무역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강 건너 불구경을 하던 루센 공작이 느닷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에 내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루센 공작이 슬쩍 윙크를 날렸다.

……진짜 미친 건가?

“그러니 금화를 새로 발행하는 건 심사숙고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요.”

“저희도 레오폴드 공작 각하와 같은 의견입니다, 전하.”

귀족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내 편을 드니, 황태자는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 좋은 의견을 내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맞습니다.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에선 가장 좋은 의견이었습니다.”

귀족들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며 황태자를 칭찬했다.

그렇게 이번 회의도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났다.

황태자가 먼저 나가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회의실을 나왔다.

곧바로 외궁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주겠습니까?”

루센 공작이었다.

이전에 회랑에서 프라시스 후작과 대화를 나눈 뒤, 그와 만났던 게 생각나 꺼림칙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이곳에서 나눌만한 이야기는 아니니,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거절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조용한 곳으로 간단 말인가.

“이곳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겠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루센 공작이 내 손목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자, 재빠르게 옆으로 피했다.

“하?”

그러자 그는 황당하다는 듯 실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저와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싫습니까?”

“네.”

“왜죠?”

“그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루센 공작은 내 말대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는데요.”

뻔뻔하긴.

“그나저나 결혼이 또 미뤄진 것 때문에 공작이 의기소침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활기찬 걸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루센 공작의 말대로 5월 초에 할 예정이었던 나와 페르데스의 결혼식은 위조 금화로 인해 경제가 혼란스러워지자, 기약 없이 미뤄졌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결혼식을 미루자고 먼저 말한 사람이 황제라는 거였다.

위조 금화 때문에 제국 전체가 뒤숭숭하니 결혼식을 미루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황제의 성정상 체르노서가 죽었을 때처럼 결혼식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울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먼저 제안했다는 게 상당히 놀라우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두 분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는 줄 알았는데, 참으로 유감입니다.”

루센 공작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공작이 제 결혼식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 남의 결혼식에 관심을 가지는 건, 결혼하고 싶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설마 당신도?

그런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루센 공작이 입술 끝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관심이 있다면 어쩌실 겁니까. 좋은 영애라도 소개시켜 줄 건가요?”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그쪽에 취미가 없을뿐더러, 아는 영애도 많지 않아 공작의 마음에 드는 상대를 소개해 줄 수가 없거든요.”

“그 부분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 루센 공작이 내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움켜쥐더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제가 관심 있는 상대는 바로 당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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