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비블로스를 만난 건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덕분에 제자들과 쓸데없이 실랑이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페르데스는 크게 심호흡하여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뒤, 최대한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콧방귀를 끼며 돌아선 비블로스는 두꺼운 열쇠를 연구실의 문에 꽂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두 번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인사하고 가더니,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나타난 이유가 뭐지? 그것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하고 싶은 것? 그 마법진에 관한 건가?”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온 거지?”
“제가 듣기로 대현자님은 인간과 엘프의 혼혈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비블로스는 문을 열다 말고, 고개만 돌려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이상한 이야기?”
“마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종족은……드래곤뿐이라고 하더군요.”
“……!”
일순간 비블로스의 눈이 커졌다. 그 안에 든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바로 앞까지 다가간 페르데스가 재차 물었다.
“드래곤……입니까?”
질문을 약간 바꿔서, 대놓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비블로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또 하나의 긍정적인 표현이 되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현존하는 생명체 중 최강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마주한 페르데스는 실소하듯이 숨을 터뜨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맞군요.”
“……그래서?”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거리에 다소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비블로스는 페르데스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어느덧 다이아몬드 형태로 변한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번뜩거렸다.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만천하에 공표할 생각인가? 마법사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만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사람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생명체가 여기 있으니, 와서 구경이라도 하라고 떠들 생각이야?”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인간들은 앞에선 아니라고 해 놓고,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는 놈들이잖아.”
표정과 목소리에서 짙은 불신이 느껴졌다.
“제 말을 믿든 말든 그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이럴 때는 믿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보다 최대한 담담하게 구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페르데스는 담백하게 말하며 그의 멱살을 잡은 비블로스의 손을 떼어 냈다.
“…….”
그러자 비블로스는 약간 혼란스러워하며 뒤로 물러났다.
의심과 불신이 범벅된 시선이 탐색하듯 페르데스의 얼굴을 훑었다.
페르데스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 줄 요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구겨진 옷깃을 폈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자 비블로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와서 이런 걸 물어볼 이유가 없잖아.”
“전 있습니다.”
“혹 그 마법진에 대해 알고 싶은 거라면 괜한 헛수고를 했어. 내가 드래곤인 걸 밝혀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마법진에 관한 일로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온 거지?”
“드래곤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정확히는 레오폴드 공작과와 연관이 깊은 레드 드래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였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말할 수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러자 비블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드래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라면, 네 연인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갑자기 웬 연인?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페르데스가 말없이 쳐다보자, 비블로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여자. 내 정체는 다 까발렸으면서, 정작 본인의 정체는 밝히지 않은 모양이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의미긴. 네 연인도 나와 동족이라고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애초에 나한테 연인 같은 건 없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아델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그녀가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도 상기했다.
비블로스가 제 몸에서 이류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던 것 역시.
‘역시 아델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레오폴드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니 고민됐다.
페르데스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비블로스는 크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미안. 연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구나.”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지.
페르데스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자, 비블로스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난 그런 쪽에는 편견이 없으니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당신의 자유지만, 거기에 저를 끼워 넣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불쾌합니다.”
“어라, 아니야?”
“아닙니다. 그리고 연인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 네 몸에서 나는 이 냄새는 뭐지?”
냄새라. 페르데스는 팔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 봤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정말로 제 몸에서 이류의 냄새가 납니까?”
“그래. 거기다 마나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게 드래곤뿐이라는 건, 드래곤만 아는 상식이거든. 그걸 네가 들었다고 하니, 당연히 동족이라고 생각한 거야.”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아델이 아닌 그노시스의 거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노시스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노시스에게 그 정보를 알려 준 건 아델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남자였다.
그러니 이번 정보도 아델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래서, 드래곤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게 뭐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겁니까?”
“그건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 일단 물어봐.”
어중간한 대답이었지만, 확실한 거절보다는 나았다.
“질문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할 겁니다.”
“다른 사람? 그게 누구지?”
“아델 레오폴드.”
비블로스를 아델에게 데리고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언급해야 했다.
아델 또한 비블로스가 드래곤이 맞다면 만나 보겠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레오폴드……라고?”
비블로스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가, 다시 가자미처럼 얇아졌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페르데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 놈, 정체가 뭐냐.”
아델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제 정체를 밝히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페르데스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아델 레오폴드 공작의 약혼자인 페르데스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 * *
위조 금화 사건이 터진 이후, 이틀에 한 번꼴로 회의가 열렸지만, 아직 제대로 된 해결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귀족들이 서로 물고 뜯기 바쁜 탓이었다.
“이럴 바엔 새로 금화를 찍어 내는 게 좋다고 몇 번 말합니까!”
“그 금화를 찍어 낼 비용은 누가 지불할 겁니까? 그리고 새로 금화를 발행하면 기존의 금화들은 어떡하고요!”
귀족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서로를 물고 뜯기에 바빴다.
혹 귀족들이 정신을 차리고, 의기투합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귀족들이 아웅다웅하는 걸 지켜보다가, 가장 상석에 앉은 황태자를 돌아봤다.
본래는 황제가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황제 대신 황태자가 참석했다.
그리고 황태자는 회의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으음, 글쎄. 전부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반황제파 귀족들을 찍어 누르고 싶어 은근히 눈치를 줘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니, 황제파 귀족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아무리 황태자가 눈치가 없는 편이라고 해도 적군과 아군을 구별 못하는 바보는 아닐 텐데, 왜 저러는 거지?
결국 이번 회의도 아무런 소득 없이, 서로에 대한 반감만 표출하는 와중, 말없이 귀족들의 이야기만 듣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줄곧 생각해 봤는데, 역시 금화를 새로 발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반황제파 귀족들의 의견에 손을 들자 황제파 귀족들은 기함하며 그를 불렀다.
반황제파 귀족들도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금화를 발행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충당하려면 그만큼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하는데, 그럼 제국민들의 삶은 지금보다 더욱 피폐해질 겁니다!”
“맞습니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면 물가가 올라 힘들어하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세금을 더 거두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부디 제국민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자기들은 제국민을 쥐뿔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황태자에겐 생각해 달라고 간청하는 꼴이 웃겼다.
황태자가 제 발로 무덤을 파는 것도 재미있었고.
황제파 귀족들이 한입 모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황태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 수 있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새로 발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오나, 전하……!”
“그래서 하는 말인데.”
황족의 상징인 황금색 눈동자가 순간 의미심장하게 번뜩였다.
황태자는 여러 가지 감정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쭉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 조금씩 힘을 보태 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