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89/262)

195화

페르데스는 잘하고 있으려나.

문득 진행 상황이 궁금하기도 하고, 안부도 물어볼 겸 나는 페르데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붉은 퓨라가 반짝거리며 오랫동안 빛을 발했지만, 페르데스는 좀처럼 통신을 받지 않았다.

“자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아니그마 왕국은 지금 새벽 시간이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통신을 끊으려는데,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야.]

이런. 한발 늦었네.

“깨워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아직요? 지금 아니그마 왕국은 새벽 아닌가요?”

[어…… 그러고 보니 새벽 4시네.]

기분 탓일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제 자야지. 응. 자야지.]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일이 잘 안 풀려요?”

정곡을 찔렀는지, 페르데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일이 어떻게 안 풀리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어제 낮에 대현자를 만나서 그 마법진에 대해 물어봤거든.]

“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더라. 달리 알아볼 방법이 없냐고도 물어봤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다른 사람들도 모를 거라고 했어.]

“저런.”

아무리 대현자라지만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을 하다니.

뭐, 그만큼 그 분야에 자신이 있는 거겠지.

“그래서 우울해하셨군요.”

[우울한 건 아닌데……. 조금 실망하긴 했어. 먼 곳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렇죠. 충분히 이해해요.”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미안.]

“아니에요. 오히려 사과할 사람은 저인걸요. 저 때문에 그곳까지 가셨는데,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가겠다고 했는걸.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나저나 생각보다 빨리 알아봤네.

대현자를 만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 못해도 두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러다 페르데스가 귀국하기라도 한다면, 황제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할 때까지 그를 타국에 묶어 두려고 했던 내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게 된다.

그건 안 되지.

어떻게든 페르데스가 귀국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이왕 아니그마 왕국까지 갔으니, 당분간 그곳에서 푹 쉬다가 오세요. 대현자랑 안면도 튼 것 같으니, 그에게 이것저것 배워도 좋을 것 같네요.”

[응, 그럴게.]

페르데스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레오처럼 내 속내를 알아채고 따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는지,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됐다.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바로 캐치하는 그가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상태가 안 좋다는 의미였으니까.

“어디 아프시거나 한 건 아니죠?”

[아니야. 건강해.]

“식사는 잘 챙겨 드시고요?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응. 토속 음식들만 빼면 나름 먹을 만해. 숙소도 편안하고.]

“그래요.”

그럼 역시 마법진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 너무 의기소침한 나머지 상태가 안 좋아진 걸까.

[있잖아.]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재차 말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먼저 불렀다.

[혹시 마법진 말고 궁금한 거 없어?]

“궁금한 거요?”

[응. 대현자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봐. 내가 물어봐 줄게.]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가령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에게 내려오는 드래곤의 축복에 대한 거라던가, 아니면 공작령의 화산에 잠든 레드 드래곤에 관한 거라던가. 그도 아니면 그대의 부친에 관한 거라던가.]

그래, 그런 게 궁금했었지.

지금은 황제에게 복수하는 데 집중하느라 잠시 묻어 뒀지만.

[대현자는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그에게 물어보면 뭔가 알지도 몰라.]

“글쎄요. 아무리 대현자라고 해도 당사자가 아닐뿐더러, 드래곤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에 대해 알까요?”

악마들이 쓰는 마법인 디아볼로스용 마법진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드래곤에 관한 걸 알고 있을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때?]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다면 모를까, 그 대현자가 아무것도 모를 시 공작가의 비밀만 새어 나가는 꼴이 될 테니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페르데스는 나와 생각이 다른지,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부 날 생각해서 물어봐 준 건데, 내가 너무 단호하게 거절했나.

여전히 대현자에게 레오폴드 공작가의 비밀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대화를 접는 건 신경 쓰여서 말을 덧붙였다.

“그 대현자가 드래곤에 대해 잘 아는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 만약 잘 안다면, 그때는 제가 직접 만나서 물어볼게요.”

빈말이긴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약 대현자가 드래곤에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땐 한번 만나볼 생각이었다.

그래. 잘 알고 있다면 말이지.

[그대가 직접 아니그마 왕국까지 온다고?]

“제가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대현자를 이곳으로 부를 수도 있죠.”

[부른다고 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야죠,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데 대현자랑 상당히 친해지셨나 봐요. 이것저것 물어볼 사이까지 되시다니.”

[그건 아니야.]

“네? 그런데 막 물어봐도 되는 거예요?”

[그게 사실은…….]

똑똑-

페르데스가 뭐라 말하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통신 반지를 손으로 감싸 쥐며 주머니에 넣고, 대답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하네스였다.

“아가씨, 이만 황궁으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알았다. 금방 나가지.”

하네스가 나가고, 나는 다시 통신 반지를 꺼냈다.

“죄송해요. 갑자기 사람이 와서.”

[아니야. 그런데 지금 황궁에 간다는 걸 봐서 수도인가 봐?]

“네. 위조 금화 사건 때문에 계속 회의하느라 근래 영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회의 때문에 황궁에 가는 거고요.”

[저런. 영지 상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텐데, 걱정이 많겠네.]

“아니에요. 그리고 영지는 많이 안정됐어요.”

여전히 주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식량이나 치료 부분은 이곳저곳에서 구호 물품을 잔뜩 보내 준 덕분에 거의 해결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쪽도 순조로웠고.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아까 하시려던 말씀이 뭐였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 같았는데.

[난 피곤해서 이만 잘게. 나중에 연락하자.]

“잠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신이 끊겼다. 

페르데스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은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의미이니 그게 뭔지 궁금했다.

어쩐다. 다시 연락해서 물어볼까.

하지만 황궁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오늘은 무려 황제가 직접 참관하는 회의이니 절대 늦으면 안 됐다.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돌아와서 물어봐야겠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마법 통신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집무실을 나섰다.

* * *

“아, 그러지 말걸.”

아무리 급해도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는 건 예의가 아닌데…….

다시 아델에게 연락을 할까 싶다가도, 회의 때문에 황궁에 가야 하는 그녀를 붙잡는 건 또 아닌 것 같아 그러지 못하고 페르데스는 애꿎은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하필 지금 아델에게 연락이 올 게 뭔지.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 와중에 그의 머릿속은 그노시스가 했던 말 때문에 뒤죽박죽이었다.

마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종족이 드래곤뿐이라는 그 말.

유적지에서 봤던 그분, 아델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그 사람이 말해 준 거면 이 정보는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말인즉, 비블로스가 드래곤이라는 의미.

“말도 안 돼.”

그 남자가 드래곤이라니. 상상만 해도 입이 떡 벌어졌다. 

비블로스가 두렵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다.

드래곤이라면 레오폴드 공작가에 전해지는 비밀들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해서 아델한테 물어봤는데, 정작 그녀는 괜찮다고 하니 조금 맥이 빠졌다.

“역시 대현자가 드래곤이라는 걸 말했어야 했는데.”

아직 확실한 게 아닌지라 말해도 될지 몰라 뜸을 들이다 보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 사실이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확실해진 뒤에 말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일단 비블로스가 드래곤이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 한다는 의미.

“어떻게 확인하지?”

대뜸 가서 ‘드래곤이세요?’라고 물어보면 절대 알려 주지 않을 텐데.

드래곤만 마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걸로 파고들면 되려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비블로스를 다시 만나는 것도 걱정이었다. 

보아하니 연구실에 자주 오는 것 같지는 않던데.

“제자들을 닦달해야겠다.”

어제 나한테 빚진 게 있으니, 그걸 이용하면 되겠지.

결론을 내린 페르데스는 이른 새벽, 숙소를 빠져나와 비블로스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래, 우선 제자들부터 만나서 비블로스를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뭐야, 너.”

그럴 생각이었는데……. 왜 당사자가 여기 있는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