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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188/262)

194화

비블로스는 소리를 지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페르데스가 들고 있던 펜과 종이도 가져갔다.

찌익, 어찌나 거칠게 가져가는지 종이가 찢어졌다. 펜촉에서 튄 검은 잉크가 탁자 위에 오점을 남겼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냐고?”

눈을 부릅뜬 비블로스가 찢어진 종이를 페르데스의 눈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이게 뭔지 알고 그리는 건가?”

페르데스가 대답하기 전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 모르겠네. 모르니까 날 찾아온 거고, 그렇지?”

이번에도 페르데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제멋대로 그렇다고 단정 지은 비블로스가 몹시 성가시게 됐다는 듯 혀를 차며 머리를 헤집었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지만, 이건 너무 용감한 거 아니야? 뭔지도 모르는 마법진을 그리려고 하다니. 그러다 마법진이 발동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은연중에 마나가 깃들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겁니다. 저는 마나가 없으니까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비블로스는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페르데스를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마나가 없다고 했습니다.”

“거짓말.”

단호한 부정에 페르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그가 뭐라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모를까, 그도 아닌지라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려는데, 비블로스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개처럼 킁킁거리며 페르데스의 몸 냄새를 맡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페르데스가 인상을 팍, 쓰며 비블로스를 밀어냈다.

“전 그쪽 취향이 아니니,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죠.”

비블로스도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변태인 줄 알아?”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다가와서 냄새를 맡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요.”

“이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다른 이유가 뭔데요.”

페르데스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한번 들어 봐 주겠다.’라는 뉘앙스로 말하자, 혈압이 오른 비블로스는 뒷목을 잡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건, 방금 제 행동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네가 거짓말을 하니까 그렇지!”

비블로스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을 하자 페르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는 마나가 없습니다.”

“이류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마나가 없다고?”

이류. 엘프나 드래곤 등, 인간이 아닌 자들을 부르는 말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내 몸에서 이류의 냄새가 난다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에 당황한 페르데스가 눈만 깜빡였다.

그의 반응을 본 비블로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물었다.

“정말로 마나가 없어?”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류도 아니고?”

“제가 알기로 부모님 모두 인간입니다.”

“그럼 이 냄새는 뭐지?”

비블로스는 다시 페르데스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냄새를 맡았다.

페르데스는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 거리에 흠칫했으나, 이상한 의도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 그를 피하거나 밀쳐 내지 않았다.

“조상 중에 이종족이 있었던 건가? 아니야. 그런 거라면 이렇게까지 냄새가 짙게 나진 않았을 거야.”

비블로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자 묻고 답했다.

“이 정도로 냄새가 짙게 난다는 건 당사자가 이류거나 주변에 이류가 있다는 건데……. 혹시 애인이 이류야?”

페르데스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아델이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아델은 단순히 축복만 받았을 뿐, 드래곤의 피를 이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것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뭐야.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지?”

어쩐다. 물어볼까, 말까.

“그 부분은 사생활입니다.”

이걸 물어보려면 제 정체를 밝혀야 하니 고민하던 페르데스는 밝히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정확히는 아델에게 물어보기 전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쪽을 선택한 거였다.

“이 마법진의 정체를 밝히는 데, 그 정보가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요.”

비블로스가 픽, 웃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다고 인정한 걸로 들리는데.”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중요한 건 저는 마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다시 맡아보니까 이류의 냄새는 나도 마나 냄새는 안 나거든.”

“마나에도 냄새가 있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대현자라서 느낄 수 있는 건가?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묻자 비블로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이건 내 사생활이고, 마법진의 정체를 밝히는 데 필요 없는 정보니 말하지 않겠네.”

그리고 자신이 했던 말을 인용해서 돌려주니, 할 말이 없어진 페르데스가 입을 다물었다.

“마나가 없다니 계속 그려도 상관은 없지만, 이게 뭔지 알고 그려야 나중에 사실을 듣고 왜 미리 말 안 해 줬냐고 날 원망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해 주지.”

비블로스는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다시 페르데스에게 보여 주며 묵직하게 말했다.

“이건 디아볼로스용 마법진이다.”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페르데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비블로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혹시 디아볼로스가 뭔지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놀라는 거야?”

“그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처음에는 무척 놀랐습니다.”

“허.”

다 알면서도 이 마법진을 그리려고 했다니.

비블로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페르데스는 가볍게 대응한 뒤 물었다.

“그래서, 이 마법진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건지 아십니까?”

“몰라.”

비블로스가 종이에 그려진 마법진을 내려다봤다.

“이게 디아볼로스용 마법진이라는 걸 알아본 건, 순전히 여기 적힌 문장 때문이니까. 마법진에 이 문장을 쓰는 종족은 악마밖에 없거든.”

“그렇군요.”

대현자도 모르는 건가.

페르데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감이 확 밀려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완성해 봐. 기적같이 내가 아는 것일 수도 있잖아.”

비블로스가 새로운 종이를 꺼내 페르데스에게 내밀었다. 기존의 종이는 찢어져서 더는 그릴 수가 없었다.

페르데스 역시 그의 말에 동감하며 순순히 종이에 마법진을 그렸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되자 비블로스가 그걸 유심히 보며 물었다.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이 마법진을 발견했는지 말해 줄 수 있나?”

“마법진을 발견한 건…….”

페르데스는 레오폴드 공작가와 아델이 연관되어 있다는 부분을 교묘하게 빼놓고,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여전히 감이 잡히는 게 없는지 비블로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모르겠어. 안타깝지만 이 부분은 내가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군.”

“이 마법진에 대해 달리 알아볼 방법도 없습니까?”

“없어. 내가 모르는 걸 다른 놈들이 알 리가 없잖아.”

무척 재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현자였으니까.

이 분야에선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먼 곳까지 왔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페르데스는 쓴웃음을 삼키며,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건이 끝났으니 다시는 그를 볼 일이 없겠지만, 끝까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연구소를 나온 페르데스는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객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노시스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

비블로스도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에 그노시스가 깊게 탄식했다.

“대현자도 모르실 줄이야……. 정말 아쉽게 됐습니다.”

“그러게.

페르데스 역시 아쉬움을 삼키며 종이에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이런 건 바로바로 태워 없애는 게 좋았다.

새카만 잿더미만 남기며 타들어 가는 종이를 보던 페르데스는 문득 궁금한 부분이 생각나 그노시스에게 물었다.

“그노시스, 혹시 마나에 냄새라는 게 있나?”

“네? 냄새요?”

그노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모르면 됐어.”

그걸 처음 듣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페르데스가 손을 휘휘 내젓자, 그노시스도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알고 있다는 거야?”

“이걸 알고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다고 해야 할지…….”

뭐지, 이 애매한 반응은.

영문 모를 행동에 페르데스가 쳐다보자 그노시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마나가 마법사들에겐 제2의 신분증으로 불릴 만큼,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마나의 특색이 다르다는 거 알고 계시죠?”

“응.”

“그 특색을 보통은 기운으로 구별하는데, 어떤 종족은 냄새로 구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종족이 혹시 엘프야?”

비블로스가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페르데스가 묻자 그노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엘프가 아니라 드래곤입니다.”

……뭐?

“이종족 중에 드래곤만이 유일하게 냄새로 마나를 구별할 수 있다고, 에튀모스의 유적지에서 만났던 그분에게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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