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페르데스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비블로스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페르데스를 바라보다가, 뒤에 서 있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분명 저 녀석이 라비린토스에 들어갔다고 했지?”
“네, 네. 맞습니다.”
가장 오래된 제자가 대표로 대답했다. 그 역시 제법 놀란 눈으로 페르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직접 저 남자를 첫 번째 자료실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줬습니다.”
“그런데 저 녀석에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그건…….”
할 말을 잃은 제자가 입을 다물었다.
미궁이라는 뜻에 걸맞게, 멋모르고 라비린토스에 들어갔던 자들이 제 힘으로 빠져나온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비블로스나 그 외에 유일하게 길을 아는 오래된 제자가 구해 줘야 했다.
물론 괘씸하게 제 연구 자료를 노리고 들어간 도둑들은 구해 주지 않았다.
하여간 그곳에 들어간 페르데스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그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단순히 들어가는 것만 봤다면 입구 쪽에서 서성거리다가 다시 빠져나온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뭐야.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 글쎄.”
다른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며 웅성거렸다.
비블로스가 다시 페르데스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온 거지?”
“그곳의 이름이 라비린토스입니까? 잘 지었네요.”
그 이름 그대로 미궁 같아요, 페르데스가 그렇게 말하자 비블로스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어쩐지 페르데스가 저를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닐 텐데.”
“음? 아, 그곳을 어떻게 빠져나왔냐고 물었었죠.”
페르데스는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사용해서 빠져나왔습니다.”
페르데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흰색 실패였다.
“저걸 이용해서 빠져나왔다고?”
“그게 말이 돼? 우리를 놀리는 건가?”
제자들은 어처구니없어했지만, 비블로스는 달랐다.
“…….”
진지하게 페르데스가 들고 있는 실패를 바라보던 비블로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실을 입구에 묶어, 돌아올 때 이정표로 사용했군.”
페르데스가 웃었다.
“역시 바로 알아보는군요.”
“당연하지.”
비블로스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꼈다.
“날 멍청이들과 비교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순식간에 멍청이들이 된 제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들을 더 창피하게 만드는 건, 여전히 실패의 용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설마 라비린토스에 들어가는 걸 미리 예상한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주머니에 항상 실패를 넣고 다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실패를 구해서, 이정표로 쓸 생각을 한 거지?”
“실패는 대현자의 제자들에게 잠시 빌렸습니다.”
그 말에 비블로스가 제자들을 돌아봤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실패의 용도에 대해 의논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쩜 이리도 바보 같은지.
“쯧쯧.”
비블로스는 자신의 제자지만 한심하게 느껴져서, 대놓고 혀를 찼다.
페르데스의 말이 이어졌다.
“거기 갈색 머리 남자가 지금부터 스승님의 자료실에 갈 거라고, 제자가 아닌 사람이 그곳에 들어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 영광으로 알라길래 뭔가 있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런 말도 했다고?
비블로스가 눈을 부릅 뜨고 쳐다보자 갈색 머리 남자, 오래된 제자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쪽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료실은 심장과 같은 아주 특별한 장소죠. 그런데 제자가 아닌 절 데리고 간다는 건 이상한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호의를 베푼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설마요. 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제게 호의가 생겼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항상 웃고 있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다니.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래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잠시 빠져나와 몸을 숨긴 뒤, 몰래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그때의 일을 떠올린 한 제자가 탄성을 뱉자, 비블로스가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 제자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절 혼자 자료실에 두고 나올 거라느니, 그러면 제가 길을 잃고 아이처럼 엉엉 울 거라느니,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다느니, 막 떠들더군요.”
페르데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지금부터 갈 곳이 길이 아주 복잡한 미로 같은 곳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제 와서 가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고, 어떻게 하면 길을 잃지 않을지 고민하다가 실을 떠올린 겁니다. 얇은 실을 입구에 묶어서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돌돌 말아서 되짚어 오면 길을 잃지 않을 테니까요.”
실패를 그렇게 사용한 거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어.
비로소 어떻게 된 건지 전부 이해한 제자들이 감탄했다.
몇 명은 재수 없게 꼼수를 쓴다며 비아냥거렸지만.
감탄한 건 비블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처럼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페르데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눈치챈 페르데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대화를 몰래 엿들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역시 절 골탕 먹일 생각으로 그곳에 집어넣은 거군요?”
페르데스는 몹시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 순수한 호의로 여러분을 도와드린다고 한 건데…….”
“크흠.”
그 얼굴에 속아 넘어가 양심이 찔린 제자들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페르데스를 라비린토스에 넣자고 주장했던 가장 오래된 제자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비블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님, 전…….”
“시끄럽다.”
“…….”
서릿발처럼 차가운 말에 제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참고로 저분이 제게 시킨 책 정리는 다 했습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페르데스가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에 오래된 제자의 얼굴은 수프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하아.”
비블로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마냥 무례했던 첫인상과 달리 영특한 모습에 페르데스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화를 내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제자가 그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으니까.
그것도 제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이니, 스승이자 연구실의 주인으로서 책임을 지는 게 맞았다.
“내 제자들이 자네한테 큰 무례를 저질렀군.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이번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만약 제가 실을 입구에 묶고 나오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어두컴컴한 미궁을 떠돌아다니며 엉엉 울고 있었을 테니까요.”
페르데스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제 팔을 감싸 안자, 비블로스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페르데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빙빙 돌려서 묻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비블로스가 판을 깔아 주자, 페르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현자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많이 들어 본 익숙한 문장.
‘역시 그런 건가.’
페르데스가 뭘 부탁할지 짐작한 비블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약간 거만하게 말했다.
“제자로 들어오고 싶다는 거라면 미리 사양하지. 더는 제자를 들일 생각이 없네.”
“저도 당신의 제자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존심을 세우느라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페르데스가 말하니 진심으로 들렸다.
‘그럴 리가.’
내 제자로 들어오는 건데, 진심일리가 없어.
누구나, 심지어 왕족도 자신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애걸복걸하는걸.
그러니 자신이 잘못 느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페르데스의 표정은 아무리 살펴봐도 진심처럼 보였다.
감히 날 거부해?
비블로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 또한 자존심 때문에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으며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뭘 부탁하고 싶다는 거지?”
“특이한 마법진을 발견했습니다.”
마법진 이야기가 나오자 뚱했던 비블로스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
“특이한 마법진이라면, 어떤 거지?”
“조용한 곳에서 보여 드리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뭐길래 저러는 걸까.
“이쪽으로 오게.”
호기심이 동한 비블로스는 흔쾌히 페르데스를 제 연구실로 데리고 갔다.
대현자의 칭호를 받은 사람치고 연구실은 상당히 조촐했다.
“자, 어서 보여 줘.”
페르데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책상에서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전에 봤던 문제의 마법진을 종이에 그렸다.
비블로스는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종이를 내려다봤다.
검은 선들이 연결되면서 차츰 마법진의 형태를 갖췄다.
페르데스가 마법진을 절반 정도 그렸을 무렵, 비블로스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그만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