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앞으로가 순탄하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관계에서 첫인상은 매우 중요했다.
상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면 더더욱 잘 보이는 게 좋았다.
그런데 비블로스에게 잘 보이기는커녕 완전히 밉보였으니, 페르데스는 크게 절망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어떻게든 이미지를 회복해서, 비블로스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비록 자존심이 조금 상하더라도.
“그 얼굴에 그노시스랑 동갑인 게 말이 돼?”
아무리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고 해도, 60대에 그 얼굴은 너무 사기 아니야?
페르데스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만졌다.
이전에 비블로스에게 책으로 얻어맞은 부위였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름을 불렀으니, 그가 화를 내는 건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책으로 때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소문대로 성질이 정말 더럽네.”
아델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그런 놈은 상종도 하지 않았을 텐데.
페르데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약간 허름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곳은 비블로스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연구소였다.
왕궁에 더 좋은 연구실이 있지만, 아무래도 왕궁이라는 특성상 보는 눈이 많으니 종종 이곳에 와서 연구한다는 정보를 며칠 전, 정보 길드를 통해 입수했다.
페르데스는 그 이후로 매일 같이 비블로스의 연구실을 찾아왔지만, 단 한 번도 비블로스를 만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그가 만난 사람이라곤 비블로스의 제자들 뿐이었다.
비블로스를 직접 만나야 그때 일을 사과하고,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을 텐데 만나지도 못하니 몹시 답답했다.
그래도 제자와 친해져서 비블로스가 좋아하는 걸 알아낸다거나,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그조차도 아니었다.
“저 남자, 또 왔네. 도대체 무슨 일로 매일 찾아오는 거야?”
“듣기론 스승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
“스승님을 왜? 설마 제자가 되고 싶은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절대로 아닌데.
페르데스는 제자들이 이상한 오해를 하며 자신을 견제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여기서 ‘난 그 재수 없는 자식의 제자는 절대 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는 것도 웃겼으니까.
‘얼른 결판을 지어야 하는데.’
그노시스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얼른 해결하고, 레오폴드 영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확히는 아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페르데스는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델과 하나씩 주고받은 마법 통신 반지로, 페르데스는 레오폴드 영지를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이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 적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아델이 연락할지 모르니까, 항상 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델은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니 좋아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갔는지, 가는 동안 힘들었던 점은 없는지 등 안부를 묻기 위해 한 번쯤은 먼저 연락할 수 있잖아.
페르데스는 순간 섭섭한 마음이 울컥하고 밀려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빨리 돌아가야겠어.”
그러려면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비블로스를 만나야 했다.
“왕궁에 가 볼까.”
거기 가면 확실하게 만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왕궁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황자 신분을 공개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더 큰 문제를 끌고 올 테니 그럴 수가 없었다.
‘역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가.’
페르데스는 여전히 그를 흘끗, 흘겨보며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자신들보다 머리통이 하나 이상은 큰 페르데스가 성큼 다가와 서자, 제자들은 움찔하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중 가장 오래된 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도 대현자께선 이곳에 오지 않으십니까?”
“네. 오시지 않습니다.”
가정이 아닌 확신이 불쾌했다.
제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기 때문이다.
대답하는 순간, 페르데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정말로 오지 않으십니까?”
“네, 네. 오지 않습니다.”
이것 봐. 지금도 피하잖아.
“그러니 더 볼일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할 일이 많아서요.”
“할 일이 많다니. 잘됐네요. 제가 도와드리죠.”
“당신이 뭐라고…….”
“저도 마조사거든요.”
마조사라는 말에 제자들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역시 제자가 되려고 온 거야.
굴러다니는 눈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저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비블로스만 만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페르데스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으면서도 겉으론 상냥하게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어려운 일인지라.”
“어려운 일이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페르데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뒤에 있는 제자들을 쓱, 훑어봤다.
여기 있는 놈들보다 내가 더 잘할걸.
눈빛에 그런 의미를 담고서.
“…….”
그 의미를 알아챈 건지 제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주먹을 꽉 쥐고 파르르, 떠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네요.”
“제가 좀.”
페르데스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가자미처럼 눈을 얇게 뜨고, 페르데스를 바라보던 제자는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염치없지만 도움을 좀 받겠습니다.”
누가 봐도 시커먼 꿍꿍이가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오후.
“음?”
오랜만에 개인 연구실을 찾은 비블로스는 희희낙락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블로스는 이틀 전, 제자들에게 아주 어려운 과제를 내 주었다.
이 과제를 해내지 못하면, 짐을 정리해서 나가라는 무서운 엄포와 함께.
물론 진짜 내쫓을 생각은 없었다.
그만큼 열심히 하라는 엄포였고,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기꺼이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바쁜 와중에 연구실을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고.
지금쯤 제가 내 준 과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지 끙끙 앓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웃고 있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설마 벌써 과제를 푼 건가?
저놈들 머리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비블로스는 의아해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아! 스승님, 오셨습니까!”
뒤늦게 비블로스가 온 걸 안 제자들이 깍듯이 인사했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군. 내가 낸 과제는 다 한 모양이지?”
과제 이야기가 나오자 제자들의 표정이 한순간 우울하게 굳었다.
비블로스가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팔짱을 끼며 물었다.
“과제도 해결하지 못한 놈들이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있었던 거지? 설마 내 욕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스승님을 귀찮게 한 놈을 혼내 준 게 기뻐서…….”
“날 귀찮게 한 놈? 누구를 말하는 거지?”
대륙에 몇 안 되는 대현자이다보니, 비블로스를 귀찮게 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그중 누굴 언급하는지 몰라 묻자, 제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도서관에서 스승님과 부딪친 놈 말입니다…….”
“아, 그놈.”
그제야 페르데스를 떠올린 비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긍정적인 반응으로 여긴 제자들이 약간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계속 스승님을 만나고 싶다며 계속 연구실에 찾아오길래, 본때를 보여 줬습니다.”
“네, 네. 맞아요. 두 번 다시 스승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혼쭐을 내 줬지요.”
“뭘 어떻게 혼내 줬는데?”
돌아온 질문에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제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지?”
“그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안 좋은 예감이 든 비블로스가 호통을 치자 가장 오래된 제자가 총대를 메고 대답했다.
“자료 정리를 핑계로 라비린토스에…… 가뒀습니다.”
“뭐?”
라비린토스.
고대어로 ‘미궁’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비블로스가 지금까지 연구한 자료들을 모아 둔 장소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단어 뜻 그대로, 자료가 있는 방에 도착하기 위해선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어찌나 복잡한지 그의 제자 중에서도 길을 외운 건 가장 오래된 제자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 페르데스를 가뒀다고?
비블로스가 비소했다.
“정신이 나갔군.”
“그, 금방 꺼내 주려고 했습니다. 두, 두 번 다시 스승님에게 덤비지 못하게 조금만 혼쭐내 주고 꺼내 주려고…….”
“쓸데없는 말은 그만 지껄이고, 지금 당장 데리고 와!”
“네, 네!”
“아니다. 내가 데리고 오지.”
그게 더 빠를 테니까.
곧장 라비린토스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비블로스는 그들 쪽으로 걸어오는 낯익은 인물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건 안절부절못하며 비블로스를 따라오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상대도 그들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바라보던 와중, 먼저 입을 연 건 상대, 페르데스였다.
“드디어 만났군요, 대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