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노시스와 헤어진 페르데스는 동쪽 복도를 쭉 거닐며, 사람들이 있을 만한 곳을 확인했다.
여긴 관계자 출입 금지 구역이니까 들어가지 못할 테고.
여긴 일반 열람실이니까, 무려 대현자나 되는 사람이 오진 않을 거야.
그렇게 비블로스가 가지 않을 만한 곳을 골라내고 나니, 남은 구역은 몇 군데 없었다.
페르데스는 그중 가장 사람이 많은 곳으로 들어갔다.
색이 옅은 백금발에 청색 눈동자.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남자치고 곱상하게 생겼으며,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입이 걸걸하며 성격도 더럽다.
정보 길드를 통해 입수한 비블로스의 정보였다.
페르데스는 그렇게 생긴, 혹은 유사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꽝이네.”
다른 곳을 가 봐야지.
그전에 그노시스를 만나서 중간보고를 들어야겠어.
혹시 그가 먼저 비블로스를 찾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노시스와 약속한 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그 안에 다시 중앙 홀로 돌아가야 하니 페르데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려던 그때.
쾅-
페르데스는 맞은편에서 등장한 누군가와 세게 부딪쳤다.
“……!”
“악!”
다행히 페르데스는 뒤로 물러서는 것에서 그쳤지만, 상대는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세게 넘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페르데스 역시 놀라며 괜찮냐고 물어보려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멈칫했다.
눈이 부신 백금발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한 듯 새하얀 피부.
남자치고 예쁘장한 외모.
“아이씨, 아침부터 재수 없게.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입.
설마 이 남자가…….
“비블로스?”
페르데스가 제 이름을 부르자 남자, 비블로스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들고 있던 책으로 페르데스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 * *
레오에게 연락이 온 건, 그가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난,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어느 오후였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각하?]
“그럭저럭.”
나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근 뒤,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벽에 기대섰다.
“루미아 섬에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한 것 같은데. 설마 이제 도착한 거야?”
[그럴 리가요. 진작 도착해서 조금 전에 글로아 섬도 다녀왔습니다.]
“뭐? 벌써 다녀왔다고?”
레오폴드 영지에서 글로아 섬까지는 통상적으로 45일 정도 걸렸고, 시간을 아무리 단축한다고 해도 40일은 걸렸다.
그런데 벌써 글로아 섬에 다녀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글로아 섬에서 하루도 머물지 않은 모양이네.”
정곡이었는지, 레오가 웃었다.
[역시 바로 알아차리시네요.]
“왜 하루도 머물지 않았지?”
[음…….]
침음 뒤에 이어지는 정적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불안한 예감이 발목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왜 그러지? 설마 소년을 만나지 못한 건가?”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뭐부터 들으실래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이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뭐부터 들으시겠어요?]
역시 소년을 만나지 못한 거구나.
왜지?
설마 황제가 먼저 선수를 친 건가?
그래서 화산 폭발을 일으켜 날 죽이려고 한 건지도 몰라.
나 대신 그 소년을 이 자리에 앉히면 되니까.
불안감이 목 끝까지 차오르며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나쁜 질문부터.”
[네. 공작 각하께서 짐작하신 대로 소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죽었거든요.]
죽었……다고?
예상과 다른 대답에 당황해서 굳어 있는 사이, 레오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 지병이 조금 있었는데, 올해 초에 갑자기 병이 악화해서 결국 죽었다고 합니다.]
“……살해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 살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레오를 믿긴 하지만, 이 부분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기에 얼버무리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하루 만에 글로아 섬을 나온 거구나.”
[네. 배를 빌리지 않았다면 다음 배가 올 때까지 며칠씩 발이 묶였겠지만, 빌린 덕분에 바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배를 빌려준 니콜 테시스에게 감사해야겠네.”
정확히는 그의 인맥이 빌려준 거지만, 어쨌거나 그의 덕분이긴 했다.
그런데 잠깐만.
분명 더 나쁜 소식이 있다고 했는데.
“더 나쁜 소식은 뭐지?”
[섬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소년은 혀가 조금씩 마비되는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뭐?
[그 탓에 처음에는 말을 어눌하게 했지만, 나중엔 입술까지 마비되는 바람에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얼굴 근육이 마비돼서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죠.]
“그 병은 설마…….”
[네. 아무래도 루브스 병인 것 같습니다.]
루브스 병.
대중들이 잘 모르는 유전병으로, 특이하게도 이 병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에게만 나타났다.
조부가 앓던 지병도 루브스 병이었고.
그런데 그 소년이 루브스 병을 앓았다는 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역시 그랬던 건가.
혹시나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닙니다.]
내가 멍하게 있는 사이 레오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그 소년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루브스 병인 것 같다고 짐작한 것뿐이니까요.]
확신이 아닌 짐작.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루브스 병에 대해 용케 알고 있네. 의원들도 잘 모르는 병인데.”
[각하에게 의뢰를 받기 전에 레오폴드 공작가를 조금 조사해봤는데, 그때 알게 된 겁니다.]
그런 거였구나.
[혹시 기분 상하셨나요?]
“아니.”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딱히 숨기는 건 아니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아무튼 그 소년은 확실히 죽었다는 거지?”
[네. 무덤도 확인했고, 그 소년이 살았던 집도 확인했습니다.]
“그럼 됐어.”
황제가 아무리 간악한 수를 쓴다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을 터.
그러니 그 소년이 진짜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라고 해도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수고했어. 괜히 먼 곳까지 보낸 것 같아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만큼 보수도 넉넉히 챙겨 주실 테고, 덕분에 각하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저도 좋네요.]
“내 기분이 좋아진 걸 어떻게 알아?”
[목소리만 들어도 딱 알죠.]
그런가.
나는 아까와 똑같이 이야기한 것 같은데.
[혹시 각하도 그 도련님처럼 크게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그 도련님?”
[테시스 백작가의 작은 도련님이요.]
아, 니콜 테시스.
[각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엄청 의기소침하던데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럴 필요는 전혀 없는데.”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더라고요. 이전에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레오는 한참 동안 불평을 늘어놓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1분 1초가 소중했지만, 먼 곳까지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잠자코 들어 주었다.
[……세상에, 그렇게 고리타분한 도련님은 처음입니다.]
마침내 기나긴 불만 불평이 끝났다.
“내가 보기엔 나름 개방적인데.”
[진짜 개방적인 사람을 못 보셨군요.]
“너도 진짜 고리타분한 사람을 못 봤구나.”
똑같은 말로 되돌려 주자 레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나중에 그 도련님을 보면 잘 위로해 주세요. 많이 의기소침했으니까요.]
“니콜 테시스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조금 찝찝해서요.]
레오가 뭣하면 지금 당장 대화를 나누겠냐고 묻자, 나는 거절했다.
니콜 테시스와도 대화를 나눌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먼 곳까지 정말 수고했어.”
이 대화도 슬슬 마무리해야지.
“당분간 아무것도 안 시킬 테니까, 주변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견문도 넓히고 푹 쉬다가 와.”
[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처럼 들리는데……제 착각인가요?]
“아니.”
답지 않게 빙빙 돌려서 말하려고 했는데, 역시 레오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들에겐 쓸데없는 짓이었다.
나는 웃으며 벽에 붙이고 있던 등을 떼어 냈다.
“당분간은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유는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겠죠?]
“잘 알고 있네.”
투툭, 툭-
난데없이 쏟아진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천둥 번개도 내리치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밖이 번쩍거렸다.
[혹시 제가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서 화난 거 아니죠?]
“아니야. 그리고 이번 일은 네 잘못이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올해 초에 죽은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한 내가 잘못한 거였다.
[으음…….]
이렇게 말했는데도 마음에 걸리는지, 레오가 침음했다.
[그럼 얼마나 돌아다니면 될까요?]
“2주면 될 거 같아.”
그 뒤에는 돌아오고 싶어도 국경이 닫혀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창밖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