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지금까지 대화해 본 바에 의하면 루센 공작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말을 툭툭, 뱉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저 발언 역시 그냥 한 말일 가능성이 컸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드는 건 알도르 경의 반응 때문이었다.
“……!”
아주 찰나였지만, 그의 눈동자가 부질없이 흔들렸다. 누가 봐도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면 동요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어째서?
예상하지 못한 그의 반응에 당황한 나는 반쯤 넋을 놓고 그를 바라봤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오폴드 공작.”
“부디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루센 공작 각하.”
반면 알도르 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나를 대신해서 루센 공작을 배웅했다.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반신반의하며 알도르 경을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그는 루센 공작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날 돌아봤다.
“…….”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눈동자가 요동치는 게 확실하게 보였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공작저로 돌아가시겠다면 마차를…….”
“방금 왜 동요한 거죠?”
“…….”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자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에런 경에게 말했다.
“에런 경. 먼저 가서 단장님의 마차를 준비해 주게.”
에런 경은 대답 대신 날 쳐다봤다.
알도르 경의 명령대로 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시선이었다.
나 역시 에런 경이 자리를 비켜 주는 것에 찬성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런 경이 떠나자 알도르 경이 내게 물었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잠시 다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아가씨?”
평소와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
그러나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내 착각은 아니겠지.
“그래요.”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회랑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기 무섭게, 알도르 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가씨께 걱정을 끼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슨 개인 사정이 있었다는 거죠?”
“그게……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꿉니다.”
꿈?
“꿈에서 저와 아가씨는…….”
알도르 경은 말을 하다 말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알도르 경?”
“……불경한 꿈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꿈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고 해도, 이런 꿈을 꿔서는 안 되는데…….”
“도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러는 거예요?”
답답해서 따지듯이 묻자, 알도르 경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입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작은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워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내가 다그치자 알도르 경은 아까보다는 크지만,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꿈에서…… 아가씨께서 제게 청혼을 하셨습니다.”
어라?
“저 말고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며 제게 결혼해 달라고…….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그래. 이건 알도르 경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꿈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실제로 두 번째 생에서 비슷한 말을 하며 그에게 청혼했던 터라 그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저건 단순한 꿈이 아닐 거야.
“그 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요.”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괜찮다는데도 마음에 걸리는지, 알도르 경은 한참을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꿈이라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아가씨께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알도르 경은 꽤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덕분에 나 역시 두 번째 생에서 그와 결혼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둘씩 떠올릴 수 있었다.
“사과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사과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먹고 싶다고 한 게 아니라 알도르 경이 저한테 주겠다고 먼저 나선 거잖아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았긴.
나도 경험했던 일이니 알고 있지.
“그냥. 왠지 알도르 경이라면 그럴 거 같아서요.”
그러나 알도르 경은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알도르 경도 크게 의심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두 번 꾸고 말았다면 개꿈이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텐데, 자꾸만 꾸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아가씨와 관련된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습니다.”
알도르 경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특히 아가씨께서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말라고 거듭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랬었지.
그땐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서워서.
알도르 경만큼은 내 편인 걸 확인하고 싶어서,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며 그러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었다.
“그래서 루센 공작이 이상한 말을 했을 때, 문득 그 말이 생각나서 동요했던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음, 아니에요.”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이해됐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이상한 꿈을 꿨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지.
……사실 꿈이 아니지만.
하여튼 알도르 경이 두 번째 생에서 있었던 일을 꿈으로 꿨다면, 지난밤,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찝찝한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당시 그도 술을 제법 먹어 취한 상태였다.
순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한 거겠지.
문제는 이 가설에는 알도르 경이 날 좋아한다는 전제 조건이 깔린다는 거였다.
알도르 경, 혹시 절 좋아하세요?
그 말이 입 안에서 굴러다니다가 사라졌다.
빙빙 돌려 말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이런 걸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친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지.
게다가 페르데스와 달리 알도르 경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 같으니, 더욱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다.
“결혼에 대한 꿈을 꾸는 걸 보니, 알도르 경도 얼른 결혼하고 싶은가 봐요.”
그래도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맞다면 단호하게 잘라 내야 하기도 했고.
두 번째 생처럼 내가 그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긴 동생이 곧 결혼한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네요. 알도르 경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길 바라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들은 걸까.
알도르 경은 쓴 약초라도 씹은 사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 *
“헉헉, 조금만 천천히 갑시다, 도련님!”
그노시스가 숨을 헐떡이며 애타게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페르데스에게 닿지 않았다.
“허억, 허억.”
결국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노시스가 주저앉자, 그제야 멈춰 선 페르데스가 그를 돌아봤다.
“고작 이 정도로 지친 거야? 그러니까 평소에 체력 단련 좀 하라고 했잖아.”
“제 나이에 이 정도 체력이면 훌륭한 겁니다만!”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가자.”
“어휴, 정말이지…….”
그노시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런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비블로스를 만나야 하니까.”
비블로스.
엘프와 인간의 혼혈로 추정되는 대현자.
페르데스가 아니그마 왕국까지 온 것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했으니.
바로 비블로스가 대체로 왕성의 연구실에만 머물고,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쯤 그를 만날 수 있을지 오매불망 기다리던 와중, 비블로스가 정기 마법 연구회 때문에 왕립 도서관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 사람이 도서관에 잠시 발만 담갔다가 떠나는 것도 아니고, 마법 연구회 때문에 최소 반나절은 머물 거라고 정보원이 그랬잖아요.”
“그렇지만 마법 연구회가 시작되면 말을 걸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어지잖아. 그러니 시작되기 전에 만나려는 거지.”
“만나 줄지도 의문입니다만.”
“일단 들이대 보면 알겠지.”
그래도 되는 건가.
오히려 상대방을 화나게 할 것 같은데.
그노시스는 반신반의했으나, 지금 페르데스의 상태를 보니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줄 것 같지 않아 구태여 입을 대지 않았다.
“얼른 가자. 조금 있으면 마법 연구회가 시작될 거야.”
“네, 네. 갑니다.”
그들은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부터 서두른 덕분에 도서관이 오픈하는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지?”
바로 왕립 도서관이 쓸데없이 넓다는 거였다.
사서에게 슬쩍 비블로스의 위치를 물어봤지만, 모르쇠로 일관해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길 다 뒤져 보는 것도 무리인데.’
페르데스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높은 도서관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노시스도 난감해하며 그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찾아야지.”
“예? 설마 여길 다 뒤져 보시려고요?”
“명색이 대현자이니 마법사나 수발을 들 사용인들을 데리고 왔을 거야.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위주로 찾아보면 될 것 같아.”
“그게 말이야 쉽지…….”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을 내놓던가.”
페르데스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그노시스는 깨갱거리며 물러났다.
“그럼 난 동쪽을 찾아볼 테니, 자네는 서쪽을 찾아보게. 찾든 못 찾든 한 시간 뒤에 여기, 중앙 홀에서 다시 만나지.”